더 북한 이홍구칼럼

대선과 남북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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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0월 4일 발표된 남북 정상의 평양공동선언과 12월 19일에 있을 대통령선거 사이에서 한국 정치발전과 남북관계 개선을 함께 촉진시키는 순기능적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또는 그 반대로 한국의 민주정치를 지탱할 국민적 합의구조 창출에 치명적 장애를 가져오는 역기능적 관계로 후퇴시킬지 선택해야 할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다.

산적한 국내 문제, 막바지에 접어든 북한 핵 폐기를 위한 협상, 치열한 국제경쟁에 대처하는 대한민국의 힘은 결국 튼튼한 국민적 합의를 토대로만 조성될 수 있다는 자명한 원리에 충실하려면 통일정책을 국민적 통합보다도 분열의 계기로 만드는 잘못은 절대로 피해야 할 것이다. 대선을 50일 앞둔 지금이야말로 통일정책과 국민통합 사이의 순기능적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정치권이 명심하기 바란다.

10·4 남북 정상선언은 뒤늦게나마 한반도에서 냉전시대의 막을 내리려는 남북 공동의 시도로 평가될 수 있다. 긴장과 대결의 시대로부터 평화적 협력의 시대로 넘어가야 되겠다는, 즉 한반도만이 역사의 예외지대로 머물고 있는 상황을 함께 타개해 보겠다는 의지표명으로 민족 구성원 모두가 환영할 만한 것이다. 공산체제 안에서도 개방과 시장경제 도입을 통해 눈부신 경제성장과 국민생활의 향상을 보여 준 이웃 중국과 베트남을 바라보며 역사의 고아가 되는 것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는지, 특히 국민복지의 엄청난 희생에 대해 두 정상이 함께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남북 정상선언을 지지하는 유엔 결의안을 유도하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지 않은가.

역사의 흐름을 타고 순항하려면 우선 역사인식의 객관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62년째로 접어든 한반도 분단의 역사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유엔의 결의에 의해 탄생되고 정당화된 대한민국의 ‘유일합법정부’ 시기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에서 유엔이 한국 방어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으며 53년 휴전협정에 유엔군사령관이 서명한 것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둘째 시기는 냉전의 막이 내린 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두 개의 국가체제가 공존하는 실제적 상황에서 평화적 통일 노력을 추진하는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비교적 광범위한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채택한 한국은 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을 북한과 합의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듯 세계사의 흐름에 동조했던 남북관계의 개선이 어찌하여 심각한 대결국면으로 후퇴하게 되었는가.

한마디로 남북한 간의 불균형, 즉 개방사회와 폐쇄사회를 대표하는 두 체제 사이의 격차가 위험수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체제 존속을 위협받게 된 북한은 핵 보유국의 지위를 추구함으로써 남북 간의 군사적 불균형을 창출하고 미국과 유엔의 핵확산금지 노력에 맞서겠다는 극단적인 모험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위험한 상황이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을 통해 해소될 가능성이 커지는 시점에서 남북 정상이 한반도를 역사의 예외지대가 아니라 그 중심에 위치시키는 정지작업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면 이는 진정 반가운 소식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희망적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는 일차적 필요조건은 대한민국의 국민적 합의를 촉진함으로써 우리의 주도적인 역량을 확보하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국력은 국민적 합의와 지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위대한 국가 건설의 꿈에 집착하는 독일이 여야를 망라한 대연정체제를 운영하는 것이나 프랑스의 사르코지 신임 대통령이 야당 인사를 중요한 자리에 앉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10·4 정상선언을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과 평화통일로 향한 구체적 진전의 계기로 만들려면 우선 이번 대통령 선거의 진행 과정에서 남북관계가 여야 대결의 중심이슈가 되지 않도록 용기 있는 정치적 결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국민이면 누구라도 평화와 통일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억지로 편을 가르는 선거는 반드시 비켜 가야 한다. 그것이 곧 통일에 기여하는 지름길이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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