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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조직·스타 '환상의 3박자'재계 회장들도 팬클럽 만들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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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 02면

올 5월 타계한 히라이와 가이시 전 도쿄전력 회장은 요미우리 자이언츠(巨人·교진)의 골수 팬이었다. 재계의 총본산 게이단렌(經團連)의 회장이던 1993년 재계의 자이언츠 응원모임 ‘산산카이(燦燦會)’를 만들었다. 창립 총회에는 200여 명의 재계 인사가 참석했다. 당시 그는 “우리 집은 3대가 자이언츠 팬”이라고 했다.

일본 사회와 자이언츠

산산카이는 해마다 총회를 열어 자이언츠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을 격려해왔다. 히라이와는 자이언츠 홈구장인 도쿄돔을 자주 찾아 백네트 뒷좌석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TV 중계 때 늘 화면에 나오는 자리다. 그가 모습을 감추면서 많은 사람이 그의 건강을 걱정했다고 한다. 그는 규제개혁에 앞장서고, 게이단렌의 정치헌금 알선을 없앤 ‘재계 총리’였다. 산산카이 회장 바통은 야마구치 노부오 상공회의소 회장·아사히카세이(旭化成)회장이 이어받았다.

19일 도쿄돔에서 열린 자이언츠와 주니치 드래건스 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보러 온 자이언츠 팬들이 이승엽 선수를 응원하고 있다. 도쿄=양광삼 JES 기자

정계에도 자이언츠 팬은 수두룩하다. 아베 전 내각의 요사노 가오루 관방장관은 휴대전화로 자이언츠 경기를 수시로 체크할 정도다. 고토다 마사하루 전 관방장관은 2005년 9월 타계 직전에도 자이언츠의 부진을 안타까워했다. 기자에게 “자이언츠는 왜 약한가. TV를 봐도 재미가 없다”고 했다. 그해 자이언츠는 센트럴 리그 6개 팀 가운데 5위였다. 모리 요시로 전 총리도 자이언츠 경기를 지켜보는 모습이 TV에서 곧잘 목격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도 라디오에 나와 “자이언츠 팬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좋은 선수들만 모아두고 이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자이언츠가) 지면 재미있다”고 했다. 일본 정치를 ‘고이즈미 극장’으로 만든 그다운 평이다.

일본의 노ㆍ장년층에게 자이언츠는 국민 구단이다. 그들이 학생ㆍ직장인이던 50~60년대 오락이라곤 스포츠와 영화뿐이었다. 자이언츠는 상승(常勝)군단이었다. 50년대 초 전후 부흥기 일본 시리즈를 3연패했고(2차 황금시대ㆍ30년대 말이 1차 황금시대), 고도성장기인 65년~73년 일본시리즈를 9연패(V9시대)했다.

자이언츠는 V9의 신화를, 일본 경제는 기적을 이뤘다. 60년 이케다 내각이 소득배증계획을 발표한 지 7년 만에 국민총생산(GNP)은 두 배로 늘어났고, 미국ㆍ소련에 이어 세계 3위로 올라섰다. 일본 전후사에 이처럼 약동적인 시기는 없었다. ‘역사적 발흥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기업에선 ‘회사 인간’들이 밤을 새웠고, 그라운드에선 자이언츠의 나인들이 분전했다. 수퍼스타 나가시마 시게오ㆍ오 사다하루와 연전연승의 팀 플레이 야구는 자이언츠를 일본인의 블랙홀로 만들었다. 자이언츠는 일본인 총주류 시대의 촉매였다. ‘자이언츠가 이기면 경기가 좋아진다’는 얘기가 생겨난 것은 이 때문이다. 실제 전후 일본의 경제성장률과 자이언츠의 승률 궤적은 닮은꼴이다.

당시 자이언츠 선수는 청소년에게 꿈이었다. 스모의 절대 강자 다이호(大鵬ㆍ32회 우승으로 역대 1위), 다마고야키(계란말이)와 더불어 ‘교진(巨人), 다이호, 다마고야키’라는 유행어가 만들어졌다. 현재의 노ㆍ장년층에게 자이언츠는 일개 구단이 아닌 셈이다. 그들과 함께한 문화요, 생활이었다. 그 시절의 추억은 자이언츠 주위를 떠나지 않게 한 구심력이다.

사카이야 다이치 전 경제기획청장관(소설가)은 정년을 맞은 전후 베이비붐 세대(스스로 ‘단카이 세대’로 명명)에게 “60세를 넘어 지행해야 할 것은 한 분야에서 장로(長老)라는 얘기를 듣는 것”이라며 “자이언츠 팬의 장로라고 하라”고 조언할 정도다.

자이언츠가 국민적 구단으로 자리 잡은 전통·조직·사람(스타) 때문이다. 프로야구제도개혁본부가 94년 ‘좋아하는 구단’을 조사한 결과 자이언츠의 인기는 압도적이었다. 각 팀의 본거지가 없는 도시에서 50.9%, 본거지를 둔 도시에서 24.3%였다. 2위 한신 타이거스는 13.8%·12.5%, 꼴찌 롯데 머린스는 0.6%ㆍ0.5%였다. 여기에는 모기업인 요미우리그룹의 미디어를 빼놓을 수 없다. 1000만 부의 부수를 자랑하는 요미우리신문, 스포츠호치 신문, 니혼TV 등이 같은 계열사다. 막강한 홍보력은 자이언츠의 버팀목이었고, 자이언츠는 모회사의 광고탑으로 보답했다. 50년대 말 TV 야구중계가 본격화한 이래 상당기간 자이언츠전만이 전국에 중계됐다.

프로야구 구단이 없는 지역은 최근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자이언츠가 전국적인 팀이 된 것은 이와 맞물려 있다.
자이언츠전 독점 중계는 자이언츠를 구계의 맹주로 만들었다. 90년대 중반까지 20% 전후의 지상파 시청률인 자이언츠전의 중계료는 다른 구단에도 돌아갔다. ‘자이언츠 천동설(天動說)’ ‘자이언츠 일극지배’ 얘기는 우연이 아니다. 타 구단과 팬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와타나베 쓰네오 구단회장(요미우리신문그룹 본사 회장 겸 주필)의 독선과 부정 스카우트 파문이 겹쳤다.

프리 에이전트(FA)제도 도입을 주도해 다른 구단의 내로라하는 4번타자를 획득했다. ‘앤티 교진’(자이언츠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총칭)이 덩달아 세를 불린 이유다. 자이언츠 대 반자이언츠의 독특한 현상은 역설적으로 자이언츠의 비중을 실감케 해준다. 89년 TV아사히의 뉴스 캐스터 구메 히로시는 자이언츠가 우승하자 삭발하기도 했다. 호시노 센이치 전 주니치·한신 감독은 “모든 악(惡)의 근원은 자이언츠의 일극 집중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자이언츠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첫째는 성적이다. 2003~2006년의 4시즌 연속 B클래스 팀이었다. 올해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주니치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약체 팀에 팬이 쏠릴 리가 없다. 둘째는 자이언츠전 시청률 저하다. 올해 자이언츠전의 지상파 연간 시청률은 9.8%(간토지구)였다. 89년 이래 최저다. 연간 시청률은 한신과 주니치에도 뒤졌다. 심지어 같은 계열사인 지상파 니혼TV는 올해 리그 우승전을 중계하지 않았다. 낮은 시청률로 프라임 타임대 중계의 채산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셋째는 다른 구단의 약진이다. 홋카이도의 자이언츠 팬은 도쿄에서 본거지를 옮겨간 니혼햄 파이터스로 쏠리고 있다.

홋카이도는 자이언츠의 텃밭이었다. 지난해 니혼햄의 일본시리즈전은 홋카이도 순간 최고시청률이 70%를 넘었다. 신생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본거지인 센다이도 같은 추세다. 프로야구의 지방 분권, 지역 밀착화는 자이언츠의 입지를 줄이고 있다. 게다가 슬러거 마쓰이, 야구 천재 이치로, 괴물 투수 마쓰자카 등 스타들의 메이저리그 진출로 일본 프로야구 전체가 공동화하는 판이다. “자이언츠는 지금 역사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2년 전 와타나베 회장의 자체 진단이 자이언츠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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