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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共 지하당 특공요원 천껑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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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 26면

1930년대 옌안 시절의 천껑(가운데). [김명호 제공]

1927년 4월 12일부터 상하이에서 시작된 국민당의 공산당 숙청은 3일 만에 300여 명을 처형하고 500여 명을 체포했다. 5000여 명은 실종되었다. 거리마다 공산당원들의 목이 낙엽처럼 굴러다녔다. 체포된 당원들이 잇따라 투항했다. 중공 중앙은 상하이로 이전했다. 사방에 위험이 잠복해 있었지만 가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중앙 군사부장 저우언라이(周恩來)는 같은 해 11월 중앙특과(中央特科)를 설립해 본격적인 지하전쟁에 돌입했다. 중앙위원 꾸순장(顧順章)과 정보과장 천껑이 공작을 지휘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2>

빈민굴 출신인 꾸순장은 키가 작고 비대했지만 권법과 창술의 달인이었다. 남양연초공사 공원 시절 시위와 파업에 두각을 나타내 공산당의 주목을 받았다. 천껑과 함께 소련에 파송돼 공작기술을 익히고 상하이로 돌아와 마술사로 위장했다. 종합 오락장인 ‘대세계(大世界)’에서 연출하던 그의 마술은 일품이었다고 한다. 진한 분장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배신자 암살 전담인 홍대(紅隊, 일명 打狗隊)를 지휘했다.

황포군관학교 1기생인 천껑은 전쟁터에서 포위되자 자살하려는 교장 장제스(蔣介石)를 등에 업고 탈출한 적이 있었다. 장제스는 그를 시위참모로 기용해 최측근에 두었다. 그러나 천껑은 공산당원이었다. 장제스를 떠나 무장봉기에 참가했다. 총상을 치료하러 상하이에 왔다가 저우언라이에 의해 특과공작에 투입되었다. 적의 심장부에 요원을 침투시켜 고급정보와 체포된 동지들을 끄집어 내오는 일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1928년 4월 상하이 경찰국은 중공의 비밀 아지트 한 곳을 급습했다. 천껑은 경악했다.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젊은 부인이 현금 5만원과 여권발행을 조건으로 공산당원 350명의 명단과 거처를 제공하겠다며 경찰국 책임자와 접촉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밀고자는 홍군(紅軍)의 아버지인 주더(朱德)의 전처 허지화(何基華)였다. 허지화와 주더의 결혼생활은 짧았다. 함께 독일 유학까지 떠났지만 의견이 맞지 않았다. 이혼한 허지화는 모스크바로 갔다. 문란한 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근거는 없다. 귀국 후 상하이에서 지하공작에 종사했지만 공산당에 실망했다. 새로운 출로를 모색하던 중이었다.

꾸순장은 허지화의 집을 습격했다. 천껑도 함께 갔다. 허에게는 새로 결혼한 남편이 있었다. 아직 넘겨주지 않은 당원들의 명단을 찾아내고 두 사람을 사살했다. 그러나 남편만 죽고 허지화는 죽지 않았다. 고향 쓰촨(四川)으로 돌아간 허지화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은둔 생활을 했다. 천껑이 가지 않았다면 허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꾸순장과 천껑은 중앙특과의 전반기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엇갈렸다. 꾸순장은 우한(武漢)에서 체포되자 투항했고 기밀을 다 털어놓았다. 상하이 지하당은 큰 손실을 봤다. 꾸는 교활하고 모략에 출중했지만 건달기질이 강하고 성격이 산만했다. 저우언라이와 천껑은 꾸순장을 캉셩(康生)과 교체하려던 참이었다. 천껑은 상하이를 떠나 전선으로 갔다. 또 부상을 입었다. 치료차 다시 상하이에 왔다가 체포되었지만 장제스는 과거의 제자이자 생명의 은인인 천껑을 탈옥시켰다.

천껑은 장정(長征)을 거쳐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전공을 세웠고 한국전쟁에도 지원군 부사령관으로 참전했다. 1955년 그에게는 대장(大將) 계급장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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