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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액권 인물 선정 … 한은 소신 어디 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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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성태(62) 한은 총재는 부드러운 표정과 달리 강경론자를 뜻하는 '매파'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1990년대 초 한국은행 자금부 부부장 시절에는 투신사에 대한 특별금융을 끝까지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부총재였던 2004년 11월에는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7명 중 유일하게 금리 인하를 반대했다. 지난해 8월엔 정부.여당의 콜금리 동결 요구에 캐스팅보트(결정권)를 행사하면서까지 금리를 올렸다. '소신 총재' 또는 '뚝심 총재'란 평가도 그래서 나왔다.

그런 이 총재의 소신과 뚝심이 최근 사라졌다. 고액권의 초상 인물 결정에서다. 8월 초 한은은 초상 인물 후보를 20명에서 10명으로 압축한 뒤 자체 홈페이지에 2주간 여론 수렴 게시판을 운영했다. 명분은 여론을 반영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여론에 기대 인물 선정 부담을 줄여보려던 의도였다. 그러나 이 게시판은 곧 특정 인물에 대한 세몰이 마당으로 변질됐다. 이해집단들 간에 특정 인물 흠집내기가 판을 친 것은 물론이다. 한은은 게시판을 폐쇄했지만 네티즌은 각종 포털 사이트와 뉴스 댓글로 옮겨다니며 '세 대결'을 펼쳤다. 참여정부식 인터넷 의견 수렴을 국민 간 감정의 골만 깊어지게 한 것이다. 결국 "한은이 네티즌을 끌어들여 여론을 떠보려 한다"는 비난만 커진 셈이다.

한은의 이후 행태는 더 보기 사납다. 최근 10명의 후보 중 4명을 추려낸 한은은 재정경제부와 최종 협의를 시작했다. 절차상 재경부와 협의는 필요하다. 하지만 고액권 초상 인물 결정은 엄연히 한은의 고유 권한이다. 한은은 두 명의 최적 인물을 선정한 뒤 재경부엔 충분한 배경 설명을 해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은은 4명의 후보를 모두 재경부에 들고 갔다. 아예 최종 결정을 재경부에 미루고 처분만 기다리는 듯하다. 한 금융회사 고위 관계자는 "이 총재는 통화금융 정책의 독립성을 외치며 재경부와는 사안마다 얼굴을 붉혀 왔다"며 "이번에 보여 주는 의외의 모습에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한은이 초상 인물 결정을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의견 수렴 절차에 문제가 많았음을 인정하는 게 아닐까. 고민을 풀려면 전문가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서울대 윤리교육과 박효종(정치학) 교수는 "화폐 인물은 국가의 상징 인물"이라며 "충분한 시간을 두고 다시 검토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김준현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