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 조사 땐 내용·근거 서면으로 요구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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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 12면

법무법인 세종의 김범수 변호사(오른쪽)가 기업 임직원들에게 행정조사에 대처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김 변호사에 이어 조춘·정환 변호사가 각각 세무조사와 공정위 조사에 관해 조언을 했다. [사진=최정동 기자]

“범법 행위를 하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변호사란 직업은 이해하지만, 조사에 잘 대처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은 좀….”

로펌의 새로운 시도 - ‘세무·공정위 조사 대처법’ 세미나

“하지만 범법 행위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도 있지요. 조사권의 범위에 모호한 부분이 많습니다. 개인 다이어리나 e-메일까지 보여달라고 하는데….”

16일 오후 서울 남산의 서울클럽 회의장. 공정거래위원회 카르텔 조사단의 박재걸 사무관과 정환 변호사가 공방을 벌이고 있다. 예정에 없던 것이다. 120여 명의 참석자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들을 지켜본다. 무슨 세미나이기에 칼(공정위)과 방패(변호사)가 공개 석상에서 맞붙은 것일까.

법무법인 세종 주최로 열린 이날 세미나의 주제는 ‘행정조사에 대처하는 방법’. 공정위와 국세청·금융감독위원회가 조사할 때 기업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조언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세종 측 변호사들의 발표가 끝나자 박 사무관이 “참석자들이 오해할 소지가 있다”며 발언 기회를 요청한 것.

“조사관이 기업에 현장조사를 나갔을 때 ‘변호사가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해야 한다고요? 우리로선 그 요청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기다리는 동안 증거를 감추거나 없애면 어떻게 합니까.”

세미나의 주제가 그만큼 민감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런 유의 세미나는 로펌(법률회사) 업계에서 처음 있는 시도였다. 김두식 대표변호사는 “주제가 부담스럽긴 했지만, 고객들이 실제 궁금해하는 것을 다뤄야 한다는 생각에서 세미나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김 대표 변호사의 설명.

“제도 보완을 촉구하는 의미가 큽니다. 행정조사가 검찰이나 경찰 수사 못지않게 경영에 미치는 영향이 큰 데도, 절차에 관한 규정이 많지 않고, 내용도 애매모호해요. 기업들, 특히 외국계 기업으로선 투자환경이 투명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가질 수 있지요.”

기자가 지켜본 바로도 이날 세미나 내용이 ‘탈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처럼 기업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언급하기를 꺼리는 ‘조사 받는 자의 권리 보장’을 공론화하는 성격이 강했다. 조춘·김범수·정환 변호사의 발표와 질의응답을 상황별로 정리해본다.

상황1 : 조사관이 사전 통보 없이 들이닥쳤는데.

공정위와 국세청·금감위는 원칙적으로 사전에 조사를 나간다는 사실을 통지하도록 관련 법에 규정돼 있다. 기업에서 자료 준비를 위한 시간이 부족할 경우 조사 연기를 요청할 수 있다. 증거 인멸이나 조작 가능성이 클 때는 예외다.

이런 사전 통보 없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기습 조사일 경우 기업은 곤혹스럽다. 이때 조사관의 신분을 확인하고, 조사할 내용과 범위·근거를 서면으로 제시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공정위 현장조사에서 임원 사무실 진입을 막은 사례가 있었는데 조사 거부·방해 행위를 한 기업은 2억원, 행위자는 5000만원까지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그렇다고 물리력을 동원해 조사관이 사무실에 들어올 권한은 없다. 국세청 조사를 방해했을 때에는 5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는데, 이것은 형사처벌로 전과가 남고 공무집행방해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

상황 2 : 조사관이 압수·수색을 하러 왔는데.

먼저 압수·수색 영장이 있는지 확인한다. 행정조사의 압수·수색에도 원칙적으로 영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세무조사라면 영장 없이도 협조할 수 있으나, 형사처벌로 이어지는 탈세 같은 ‘범칙 조사’는 영장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컴퓨터나 노트북을 압수하려고 할 때다. 컴퓨터에 임직원 개인의 은행 계좌 정보나 애인과 주고받은 e-메일 같은 사생활 관련 자료가 들어 있을 수 있다. 경쟁 회사가 알아선 안 될 영업비밀 자료도 있을 수 있다. 프라이버시와 영업비밀 보호 차원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조사기관도 이들 자료를 어떻게 분류하고 관리할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 법을 어겨가며 얻은 증거는 증거능력을 배제하는 형사소송법 규정이 내년 1월부터 시행되는데, 행정조사에서도 참고할 수 있다고 본다.

상황 3 : 조사관이 진술하라고 종용하는데.

헌법 제12조 2항은 형사 절차에 있어 진술 거부권, 즉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행정조사도 공권력의 행사인 데다 형사처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은 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조사 자체에 불응하거나 거짓말을 꾸며내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허위 진술을 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엔 처벌받을 가능성이 있다. 진술할 때는 간단 명료하고 완결된 형태로 해야 하고, 즉시 답변하기 어려우면“좀 더 파악해보고 진술하겠다”고 밝힌다.

구체적으로 공정위 조사를 예로 들면, 원가와 경영정보 같은 팩트(사실) 부분은 진술할 의무가 있으나 담합을 했는지, 어디에서 만나서 어떤 논의를 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

상황 4 : 조사 과정에서 변호사의 도움을 받고 싶은데.

조세 관련 법률은 변호사·회계사·세무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이 같은 권리가 공정위나 금감위 조사에서도 인정되는지에 관한 판례가 아직은 없지만, 폭넓게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 기업들이 “변호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조사관들에게 말해도 되느냐”고 묻는 경우가 많은데, 가급적 변호사 참여하에 조사 받을 것을 권한다.

즉시 변호사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경우라면, ‘코디네이터’(조정자)를 정해 조사 진행 상황을 모니터해야 한다. 조사관들이 가져가는 서류는 복사해 사본을 만들어 놓고, 조사가 각 부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신속히 파악한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변호사-고객 간 비밀유지 특권(Attorney-Client Privilege)’이 또 하나의 쟁점으로 다뤄졌다. 변호사가 고객을 위해 작성한 법률검토 의견서가 압수·수색돼 고스란히 조사기관의 손에 넘어가는 일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처럼 변호사 의견서가 증거로 쓰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사내(社內) 변호사도 자료 제공을 거부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주를 이뤘다.

김범수 변호사는 “변호사법과 형사소송법에서 변호사의 고객비밀 보호 의무를 강조하고 있는 만큼 법률검토 의견서의 제공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본다”면서도 “하지만 회사에 고용돼 있는 사내 변호사는 외부 변호사와 달리 비밀유지 특권을 주장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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