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쓸쓸한 박수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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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 02면

서울 창신동 옹색한 마루를 작업실 삼아 그림을 그리던 1960년대의 화가 박수근(맨 오른쪽).

지금이야 한 점에 수십억원대 작품의 주인공이 됐지만 박수근(1914~65)은 궁핍한 시대의 화가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막 끝나고 난 1950, 60년대가 다들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해도 그는 더 힘겨웠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림만 그려서는 살 수 없던 시대에 거의 유일했던 전업 화가였기 때문이죠. 작품을 팔아야 쌀을 사고 아이들 학교 공납금을 낼 수 있었기에 그는 죽기 살기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사줄 사람을 찾아헤맸습니다.

순화동 편지

60년께 반도호텔(지금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반도화랑에서 화상(畵商) 일을 배우기 시작했던 박명자(갤러리 현대 사장)씨는 당시를 돌아보며 “지금도 고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씻을 길이 없다”고 말합니다. 박수근은 당시 반도화랑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는데, 드나드는 손님들 대접을 해야 하는 박명자씨로서는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겠죠. ‘저이는 왜 저렇게 매일 오는 걸까’ 내심 귀찮아했는데 나중에 화가의 부인에게 이유를 듣고는 가슴이 찡했다고 하네요.

덩치가 큰 편이었던 박수근은 즐겨 마시던 막걸리 탓에 간과 신장이 몹시 나빠져 말년에는 몸이 날로 부어 올랐답니다. 그러니 대소변 보는 일이 얼마나 고역이었겠습니까. 박수근은 반도호텔에 있던 신식 양변기의 널찍한 화장실을 아주 좋아했다는군요.

작품도 팔아야 했지만 편안하게 민생고를 해결할 수 있는 반도화랑 출입이 잦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요즈음 미술품 경매만 열렸다 하면 신기록을 경신하는 박수근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씁쓸해지는 건 이런 까닭도 있습니다. 구차하게 화장실을 찾아다녀야 했던 화가는 갔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이제 한탕을 노리는 소장가에게 떼돈을 벌어주는 마술 그림으로 변했다는 거지요.

2년여를 끌어온 박수근 작품의 위작(僞作) 논란이 결국 ‘모두 가짜’였다는 검찰 수사 판정으로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는 소식을 들으며 다시 한번 고인을 생각합니다. ‘분명 진짜’라고 주장한 소장가가 내놓은 박수근의 그림 가운데 몇 점은 50년대 여자 중학생이 그린 것에 서명만 한 조악한 작품인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박수근을 ‘신화’로 만들어 팔아 먹으려던 사기꾼들의 모의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과정을 합법이 되도록 거들어준 미술계의 협잡은 아직 어둠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사건 관련자 처벌을 위한 마지막 보강 수사를 하고 있다”는 담당 검사의 말이 제대로 실천되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오로지 편안하게 볼일을 볼 수 있는 화장실을 찾아헤매던 박수근이 요사이 자신의 작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을 알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요. 자신의 작품을 알아주지 않던 세상에 대한 분노를 막걸리 한잔으로 풀던 그는 저승에서 다시 막걸리 잔을 들지 모르겠습니다. 박수근은 생전에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선한 희망이 늦게나마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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