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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살리는 길에 나선 사람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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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 04면

사진 최정동 기자

15일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지는 “노벨위원회가 ‘평화’의 의미를 넓히다(Nobel Committee expands definition of ‘peace’)”라는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 유엔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PCC)가 기후 변화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것과 관련해서다. 노벨위원회는 선정 이유에 대해 “지구의 자원을 차지하려는 과도한 경쟁이 지구 온난화를 초래한다”고 지적하면서 지구 온난화에 대처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을 평화유지 활동과 연계시켰다. IHT는 이것이 분쟁 해결, 사형제 폐지 등과는 달라진 평화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더워지는 지구와 파괴돼 가는 자연환경이 인류의 ‘평화’ 문제로까지 인식되는 시대. 환경재단과 환경운동연합이 공동으로 15일 ‘지구 온난화 시대, 우리 삶의 양식과 도시공간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삼성물산 후원)을 열었다. 심포지엄 참석차 내한했던 알랭 부르댕(파리 제8대학 도시설계학과) 교수를 건축가 승효상(종합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씨가 따로 만나 인터뷰 형식의 대담을 했다.

승효상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주제가 도시(city)였던 데서 알 수 있듯 도시문제가 문화계의 주된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부르댕 최근 도시에 대한 관점뿐 아니라 환경에 대한 인식까지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환경에 대한 인식은 크게 두 단계로 볼 수 있는데, 20년 전까지만 해도 ‘자연을 보호하자’가 환경운동의 전제였죠. 수질 개선이나 폐기물 안전처리 등을 통해 시골 자연을 본래대로 보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에너지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인지가 주된 관심이 됐습니다. 최근 두드러진 두 번째 단계는 지구온난화와 관련 있는데요. 4~5년 전부터 이 이슈가 대두되면서 이젠 일부가 아니라 전체 지구인의 관심사가 됐습니다. 모두가 지구 온난화에 대해 걱정하고 있지요.

승효상(왼), 부르댕(오)

이와 함께 도시의 관념이 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서양인에겐 국가의 역할이 컸지만 요즘 현대생활의 중심은 도시입니다. 그래서 도시 개발 전반에 대한 관심이 큽니다. 공간을 낭비하지 않고 더 효율적인 도시 건설에 힘쓰자는 것입니다. 발전을 이룬 도시는 많지만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까는 여전히 문젯거리지요.

시대 따라 변해야 할 도시의 효율성

승효상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도시화가 기능주의·효율성 위주로 진행됐습니다. 도시가 메트로폴리스가 되고, 메가로폴리스가 됐지요. 요즘 말하는 공간을 낭비하지 않는 효율성이란 것도 결국 옛날 패러다임 그대로 되풀이해 도시를 개발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 효율성이 여전히 의미가 있을까요. 말하자면 효율이 언제까지나 우리 도시의 원천이 될 수 있을까요.

부르댕 산업혁명부터 20세기까지 추구했던 도시의 효율성과 요즘 효율성은 다르다고 봅니다. 예전엔 생산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오늘날은 교환·나눔에 초점을 맞추는 효율성이지요. 도시 형태가 예전과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요즘 효율성의 중심은 상업자본·정보교환·교통입니다. 효율성은 인류 존재 자체와 궤를 같이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인류·도시 발달과 함께 효율성의 의미도 변화해 왔고, 그렇기에 효율성에 대한 우리 생각도 달라지는 것 아닐까요.

승효상 동양의 예를 보면 효율성이 아니라 무위가 중심이었습니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서구화 이후 서양의 뒤를 쫓아가느라 동양도 지금은 서구와 다를 바 없이 돼 버렸습니다. 요즘 서양에선 동양에 대한 탐구를 다시 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반효율이 우리 삶을 더 지속시킬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의식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부르댕 철학적 토론이 가능할 것 같은 이야기군요. 동양만이 아니라 서양에서도 일어나는 지속 가능한 개발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환경·사회의 인식에서 효율성을 다르게 정의하자는 것이죠. 효율성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반세계화 같은 것도 있고요. 효율성이 환경과 사회에 폭력을 행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럴수록 사회에서 어떻게 효율성을 정의해 나갈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폭력적이지 않은 효율성을 정의 내릴 것인가의 문제라고 봅니다.

승효상 효율성과 반효율성의 대립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온실가스를 적게 배출하는 산업이나 배기가스를 적게 내는 자동차 같은 것은 가만 있으면 질식해 죽을지 모를 위험을 막아 인류의 생명 연장을 도와주자는 전제를 깔고 있지요. 그러나 비효율성의 가치를 높이는 게 오히려 전혀 다른 사고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부르댕 서로 다른 시간의 개념을 갖고 얘기하는 듯하군요. 나는 30년을 생각하는데 선생님은 더 긴 시간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엔 산업화로 인한 파괴가 심각합니다. 30년간 산업구조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환경산업의 발달을 통해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점이 산재해 있습니다.

물론 100년이나 150년이 지난 뒤엔 지금과 다른 사회문화적 모델을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현재의 개인화·산업화된 사회구조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모델을 생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장 우리가 직면한 긴급한 문제는 환경 효율성을 따져 해결해야 한다고 봅니다.

점점 살기 힘든 현대 도시

승효상 간략히 여쭙자면 도시는 항상 진보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부르댕 어떤 방향에서의 진보를 물으시는 거죠?

승효상 과거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진다는 의미에서의 진보이지요.

부르댕 질문에 그렇다, 아니다를 한번에 답변하기 힘들군요. 도시가 건설되면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이 둘 다 있습니다. 그런데 안 좋은 점은 바로 그 좋은 점에서 유래되기 마련입니다. 도시의 좋은 점은 편리하고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점점 그 의의가 상실돼 가면서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기 힘든 게 현대 도시입니다. 항상 진보 쪽이라고, 항상 후퇴 쪽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지요.

승효상 도시는 항상 생성·변화합니다. 이제껏 말씀하신 도시는 주로 서양에서 발달된 도시들 아닌가요. 그러나 이슬람권의 도시들, 예컨대 모로코의 페스나 마라케시 같은 도시를 보면 천년 전에 건설됐지만 효율화·개인화되지 않고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속이 안 된다고 아우성치는 현대 도시들이 이런 도시들로부터 배울 건 없을까요.

부르댕 둘 다 잘 아는 도시인데 서로 다른 케이스입니다. 페스는 효율성이 훌륭한 도시지요. 물류·유통이 잘 이뤄져 있습니다. 종교와 상업이 잘 만났고, 특히 수질 경영은 배워야 할 점입니다. 그에 비해 마라케시는 정치·종교적 특성에 초점이 맞춰져 효율성이 없습니다. 제3세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도시들에도 효율성이 있습니다.

두 가지 유형인데 첫째, 옛날에 건설됐지만 설계의 섬세함이 있는 도시들입니다. 이들은 서비스가 간단하고 구상이 훌륭하지요. 둘째, 라고스·상파울루 같은 도시들인데, 이들은 현대에 가까운 도시라기보다 앞으로 나아갈 미래의 모습 같은 도시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대도시는 상파울루가 겪는 현재의 문제점을 언젠가 겪게 될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수한 분위기 지닌 서울

승효상 마지막으로 서울에 관해 질문하겠습니다. 한국은 5000년의 역사가 있고, 서울을 비롯한 옛 도시가 많습니다. 이들을 재개발하는 정책은 효율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지요. 이런 제3세계에 해줄 충고나 해결책이 있으신가요. 도시로서 서울의 첫인상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부르댕 두 가지로 대답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감히 충고를 드릴 수 있을까 싶습니다. 저는 서울이나 한국을 잘 모릅니다. 안다 해도 “~해야 한다”는 충고는 하기 힘듭니다. 세계가 일부 모델을 따라 획일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지역적 특성을 떨어뜨립니다. 도시계획을 세울 땐 그 도시가 어떤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지, 고유한 형질이 뭔지 파악해야 합니다. 나는 세계건축가대회나 콩쿠르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건축가를 모시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들이 제대로 일하려면 현지인과 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모델이 세계 전체에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국제기구 같은 데서 실제 도시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해야 한다”는 식의 충고를 하는 것에 화가 납니다.

다음으로 긴 역사를 가진 도시는 문화유산을 많이 가진 도시입니다. 문화유산은 풍부한 자원이기도 하지만 짐을 지워주기도 하죠. 역사는 현재에도 존재하지만 단지 현재가 아닙니다. 도시는 현재가 중요합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 좋게 느끼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도시계획 때 주민이 원하는 모습이 도시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시의 역사성이 정체성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서울의 인상에 대해 말하자면 나흘 동안 머무르며 관점이 확 바뀌었습니다. 처음엔 미국을 모방한 듯한, 볼 게 없는 국제도시로 보였는데 어제 자유시간 때 많이 산책하면서 서울만의 특수한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물론 단지 여행자의 입장일 뿐이겠지만 말이죠.

승효상 충고를 부탁드리긴 했지만 사실 20세기 모더니즘 모델의 시대는 이미 갔다고 봅니다. 동양에서 도시는 주민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고 땅이 갖고 있는 원리에 따라 건설됐습니다. 도시는 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점에서 동서양은 달랐습니다. 지금은 같아졌지만요.

부르댕 그 말씀이 맞습니다. 사실 한국이나 동양을 잘 모릅니다. 중국 정도만 알 뿐이지요. 동양에선 땅에 가치를 뒀다고 했는데, 서양에선 주민에 가치를 뒀습니다. 수많은 다양한 법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생각해 설계했던 것이지요. 동양에서 땅이 의미하는 많은 것이 서양에서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승효상 도시 만드는 방법이 땅의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제 생각에 동의해 주시기를 바라며 말씀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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