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의학 韓流는 내 손 안에 있소이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2호 10면

1.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의 함자 거리 103번지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 한방병원 앞에 선 김광락 원장. 개량한복을 차려입은 모습이 곱다.

예나 지금이나 한의사는 최고의 인기 직업이다. 최근 한의사들 사이에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지만 대체로 물질적·시간적 여유와 사회적 지위 등을 두루 누린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삼대(三代)가 한의원을 대물림한다면 복 받은 집안이라고 하겠다.

박상주가 만난 사람-우즈베키스탄에서 한의학 전파하는 김광락씨

김광락(49)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 한방병원 원장은 삼대째 한의사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조부는 경북 포항에서 부산당 한약방을 했다. 부친은 지금도 영덕에서 대명당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다. 2남3녀의 맏이였던 그도 순조롭게 가업을 이었다.
1987년 동국대 한의대를 졸업한 뒤 해군 학사장교(OCS 78차)로 군복무를 마쳤다. 1990년 7월 전역과 함께 포항에서 ‘김 한의원’을 개업했다. 15년간 돈도 많이 벌었다고 했다. 그런 그가 무슨 연유로 우즈베키스탄까지 오게 된 걸까.

밀린 세금 내는 마음으로
지난 9월 24일 오전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의 함자(Khamza)거리 103번지에 위치한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 한방병원을 찾았다. 아름드리 단풍나무 두 그루가 보초처럼 현관 좌우에 서 있는 아담한 단층 건물이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KOMSTA) 공동 소속의 한의사 3명, 물리치료사 1명이 봉사하고 있는 곳이었다. 환자 대기실엔 십여 명의 환자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황색 개량한복 차림의 한국인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진료실에서 나왔다. 김 원장이었다. 차분하고 선한 인상이다. 그의 방에서 따끈한 차 한잔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2. 계획도시인 타슈켄트에 새로 건설된 ‘하즈라티 이멈’ 모스크. 3. 타슈켄트의 시장통으로 유명한 ‘초르수 바자르’ 들머리에 있는 수도에서 물을 받는 아낙네. 4. 우즈베키스탄 타슈미 의대 내과 전공의 출신인 여의사 수라요(가운데 가운 입은 이)에게 김 원장이 침놓는 법을 지도하고 있다

미안함. 김 원장은 이제껏 세상에 대한 미안함을 지닌 채 살아왔다고 했다. 나만 너무 잘살고, 나만 너무 혜택을 누리는 게 아닌가 하는 불편함 같은 걸 떨쳐버리기 힘들었다고 했다.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걸 가슴속에 품고 산 셈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한약방을 한 덕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지요. 나 역시 큰 고민 없이 가업을 이었고, 그 덕에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밀린 세금을 잔뜩 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어요. 달리 표현하자면 숙제를 하지 않았을 때의 개운치 않은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틈나는 대로 미얀마·스리랑카 등지의 단기 해외봉사활동에 참가하다가 2005년 7월 제대로 된 봉사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통상적으로 KOICA 봉사기간은 2년이다. 김 원장은 이를 1년 더 연장했다. 그동안 함께 고생한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했지만 양해를 구했다. 무엇을 더 하고 싶었던 걸까.

“그동안 하루 80여 명의 내원 환자를 진료했습니다. 이따금씩 고려인들을 위한 특별진료 프로그램도 마련했지요.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제 스스로 능력의 부재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엔 의료인으로서의 진정성과 희생정신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개인이 짧은 기간에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아득바득 환자들을 돌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봉사의 효율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지요.”

우즈베키스탄에 한의학 뿌리내리기
‘敎以學行 備給書冊’(교이학행 비급서책: 학문과 행함으로써 가르치고, 서책을 갖춰 주도록 하라). 오랜 숙고 끝에 김 원장은 퇴계 선생이 후손들에게 남긴 말씀을 떠올렸다. 우즈베키스탄에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이곳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외부의 도움에 의지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현지 전문인력을 교육시켜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무료 진료를 무한정 베풀 수는 없습니다. 현지 의사를 양성하는 작업이 보다 근원적인 봉사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김 원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즈베키스탄에 한의학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한의사를 양성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다.

“우즈베키스탄은 한의학이 정착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우선 이곳에 한의학이 진출한 지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약이나 침에 대한 거부감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한방을 신뢰하는 고려인도 많고,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좋습니다. 최근 이곳 의학계에서 한의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까닭입니다.”

진료실로 향하는 그를 따라나섰다. 한 진료실로 들어서자 젊은 우즈베키스탄 여의사가 능숙한 솜씨로 한 환자의 손과 발에 침을 놓고 있었다.

“타슈미 의대 내과 전공의 출신인 수라요라는 친구입니다. 이곳 한방병원에서 7년째 한의학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서부의 누쿠스엔 침구 한방진료를 하고 있는 고려인 의사가 있습니다. 이들 외에도 관심을 보이는 현지 의사들이 늘고 있어요. 한 해 10명씩 한의사를 양성한다면 10년이면 100명입니다. 그때쯤이면 이곳에 한의학의 뿌리를 단단하게 내릴 수 있을 겁니다.”

한의학 전파의 현장
마침 점심 먹을 때가 되어 병원 식구들이 구내식당에 모였다. 큰 테이블이 달랑 하나 놓인 미니 식당이었다. 자원봉사 한의사 3명, 물리치료사 1명, 현지 의사 1명을 포함해 모두 15명이 둘러앉았다. 김치찌개와 잡채, 부침개 등 조촐하지만 정갈한 우리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고려인 주방 아줌마의 솜씨라고 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직원들은 주로 도시락을 싸 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니 막상 서로 얼굴은 자주 대하면서도 대화할 시간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병원 구석 방 하나를 식당으로 만들었습니다. 따뜻한 밥도 먹고, 병원 식구들끼리 정담도 나누는 공간이지요.”

서둘러 식사를 마친 김 원장이 양해를 구하면서 먼저 자리를 떴다. 우즈베키스탄 현지 의사들을 상대로 한방 강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살짝 뒤따라 들어가 강의 장면을 지켜봤다. 다섯 명의 어른 학생이 열심히 메모를 해가며 김 원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 한의학을 전파하는 현장이었다.

얼마 전 우즈베키스탄에서는 한의학을 소재로 한 우리 드라마 ‘대장금’이 방영돼 큰 인기를 끌었다. 대장금과 그 주인공 이영애씨의 인기만큼 한의학 붐이 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름 하여 ‘한의학 한류(韓流)’!


박상주씨는 18년 동안 신문기자로 일하며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나 얘기 나누는 걸 즐긴 언론인으로 지금은 세계를 방랑 중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