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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검객 시라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요즈음에도 촛불을 켜놓고 찢고 또 찢으며 밤새도록 사랑의 편지를 쓰는 구식 사람들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1960년 영화『검객 시라노』(Cyrano de Bergerac)는 여러 면에서 연애편지를 생각나게 한다(「연애편지」라는 골 동품 단어는1940년대와 50년대,그리고 60년대까지만해도 얼마나 가슴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아름다운 말인가).
우선 시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1868~1918)의 대표적 희곡을 원작으로 삼아만든 이 영화의 대사『당신은 누가 꺾어주기를 바라는 하얀 장미올시다』처럼 모두 연애편지에 인용해 써넣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이 영화의 주제 그 자체가 바로 연애편지이기도 하다.
주인공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17세기에 실존했던 프랑스의 작가요,극작가이고 검객이었으며 자유분방한 사상가에 검술도 뛰어났고,『아그리피나의 죽음』같은 비극도 썼지만 달나라와 해나라로그가 여행을 가서 보았다는 상상의 제국들을 묘사 한 희극적인 역사(Histoire Comique)가 대표작으로 꼽히고 무엇보다 코가 크기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얼마전 제라르 데파르듀 주연의 프랑스 영화로도 우리나라에 소개된바 있지만 1950년 마이클 고든이 감독한 영화에서 아카데미상을 받은 호세 페러가 그려내는 시라노 역시「몰리에르가 표절할」만큼 대단한 극작가요,입을 열기만 하면 시구가 꿀물처럼 줄줄 흘러나오는 시인이요,뒷골목에서 한꺼번에 백명의 적과 대결해모두 물리칠 정도로 뛰어난 검객이다.
그러나 문무를 겸비한 그에겐「나보다 15분을 앞서가는」흉측하게 커다란 코가 수치스런 약점이요,열등감의 원천이어서 누가 코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당장 칼을 뽑아들고 결투를 벌이고는 한다.
요즈음 텔레비전 사극『한명회』에서 이덕화가 달고 나오는 당나귀 귀만큼이나 과장된 큰 코를 달고 영화에 등장하는 시라노.그는 괴이한 자신의 모습때문에 록산을 사랑하면서도 거절당할까봐 겁이 나서 차마 고백하지 못하고 그의 부대 소속인 부하 크리스티앙이 그녀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며 14년 동안이나숨어서 「어둠 속의 목소리」로 사랑을 한다.
록산의 집 발코니 밑 나무 뒤에 숨어 크리스티앙에게 시라노가사랑의 고백을 한 구절 한 구절 연극 공연의 프롬프터처럼 읊어주던 애타는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이기까지 했다.시라노의 대리 사랑 고백에 감동한 록산은 크리스티앙에게 첫 키 스를 허락하고…. 크리스티앙도 결국 록산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현실을 깨달으면서 회의에 빠지고 만다.그녀가 영혼을 바쳐진심으로 사랑하던 사람은 언어의 희롱이 빚어낸 환상속의 남자일따름이었고,그래서 마음은 숨어서 사랑하는 시라노에 게 빼앗기고자신은 록산에게서 기껏해야 헛사랑밖엔 받지 못하리라는 슬픔에 빠져 크리스티앙은 전장에서 유탄을 맞고 죽는다.
크리스티앙의 죽음과 더불어 더 이상 록산에게 대역을 내세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게 된 시라노는 자신도 죽은 셈이라고 생각하지만,워낙 공격적인 성격이어서 많은 적을 만들어 오던 터에 결국 어느 적들의 함정에 빠져 뒷골목으로 쫓아갔다 가 그를 덮친 마차에 치여 죽음을 맞으면서 시라노는 록산에게 마침내 사랑을 고백한다.
『내 무덤에 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불면 낙엽을 보며 두 사람을 생각해주오.크리스티앙을 위해 당신이 흘린 눈물은 나를 위한눈물이기도 했다는 것을』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면서.헤밍웨이의『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에서 로버트 조던이 마리아에게 존 던의 시구를 인용해가면서 전해주는 작별의 말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어떻게 보면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얘기는 장 콕토의 『미녀와 야수』나 페이 레이와 킹 콩의 사랑 얘기와도 흡사한 옛날옛적의 사랑 모습이다.『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라는 노랫말도 있지만.
〈安正孝.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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