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R&D 체제 이렇게 고치자] 中. 연구개발 '첫단추' 기획 비중 늘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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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6면

지방대 생물학과 A교수는 "정부과제 하나를 따내기 위해 1년 내내 인터넷 사이트를 휘젓고 돌아다녀야 한다"며 목청을 돋운다. 과학기술부를 비롯해 산업자원부.보건복지부.환경부 등 바이오기술(BT) 관련 정부과제가 부처별 홈페이지에 우후죽순 뜨다보니 정보수집력에서 떨어지는 지방대에서는 인터넷 사이트 뒤지는 일이 일상사가 됐다는 것이다.

정부부처를 가리지않고 과제발주 현황을 알려주는 종합 사이트가 아쉽다고 덧붙였다. A교수는 "행여 과제를 따내더라도 부처별로 평가와 정산 방식 등이 제각각이어서 없는 살림에 평가업무 등을 도맡을 전문인력을 별도로 고용해야 할 판"이라고 불평을 쏟아냈다.

올해 정부 연구개발비는 6조8백억원. 이를 적재적소에 배분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면 연구개발 시스템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적어도 A교수의 불만처럼 정부부처별로 '너 따로 나 따로' 식의 연구관리 제도 아래서는 연구성과 효율을 극대화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현장의 목소리다.

과기부가 국가 과학기술체제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과기부 장관이 부총리급 격상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중점을 둬야 할 연구개발 시스템의 혁신요소들을 알아봤다.

◆프로그램 평가 서둘러야=지금까지 연구자원의 활용은 분배에 치중해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치밀한 분배에 주력하다보니 분배의 정확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세부과제 평가와 기관 평가 등 결과물에 대한 평가가 줄을 이었다. 그만큼 연구자들은 "평가 준비하다 세월 다간다"고 푸념해왔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민철구 혁신시스템팀장은 "연구개발의 생산성 면에서 최근 들어 단기 효율성보다는 3~5년 뒤 나타나는 기술적 성과와 경제.사회적 파급 등 중장기 효과를 따지는 경향이 세계적"이라며 "연구 개발비의 파이가 커지는 만큼 보다 종합적인 시각에서 연구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 위주로 평가가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5년간 7천억원을 투입한 G7(선도기술개발) 사업을 끝내고 지난달 전체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를 치렀지만 이같은 평가가 프로그램 진행 중에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프로그램의 방향 재설정 등으로 피드백을 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프로그램 평가는 우선 전체 사업의 목적 달성 정도를 따지고,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있는 대단위 사업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프로그램의 진행방향과 목적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판단해 한쪽 방향으로 특화하거나 최악의 경우 중지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엄청난 예산을 사용하는 만큼 재원을 제공한 국민에게 자기반성은 물론 파급효과에 대한 홍보에도 평가 결과를 활용한다.

◆기획 비중을 키워야=미국이나 영국이 연구개발비 가운데 연구개발 사업을 실시하기 전 기획에 사용하는 비용은 3~5%에 달하는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1.5% 수준에 불과하다. 그만큼 '첫단추'에 비유할 만한 기획에 소홀했다는 방증이다. 과기부 김이환 연구개발기획과장은 "대략 4월에 예산안을 만들어 연말에 기획예산처에서 사업예산이 확정된다"며 "급하게 서두르지 않으면 다음해 사업을 시작하기 힘들어 기획에 3개월 정도밖에 들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총리실 산하 기초기술연구회의 조성복 사무국장은 "기획기간이 대체로 짧은 만큼 중도에 포기하는 과제도 상당수"라며 "특히 신물질에 대한 연구과제를 수행하면서 특허검색조차 충분히 수행하지 않은 황당한 경우도 꽤 있다"고 말했다.

기획예산처로부터 연구개발비의 예산권을 과기부가 넘겨받게 되면 기획에 대한 비중을 상당부분 늘릴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다. 과기부가 국가 연구개발 분야의 종합조정권을 갖고 중장기적으로 예산을 책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기부가 연구개발 예산권을 전문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미래 산업과 기술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줄 민.관 합동 위원회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연구회 체제 손질해야=과기부가 기존의 응용.실용화 연구개발사업을 산자부와 정통부 등으로 이관한다는 방침이 정해지자 대덕연구단지 내 정부출연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과기부가 연구개발에 관련된 노하우를 축적시켜 왔는데, 다른 부처로 이관될 경우 연구현장에서 겪는 혼란은 적지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렇지않아도 19개의 과학기술계 출연연이 60여개의 '미래핵심연구소'로 개편된다는 방안이 국무조정실에서 검토되고 있어 대덕의 분위기는 예사롭지 않다. 또다시 외환위기 시절의 구조조정 태풍이 불 수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출연연의 안정적인 연구분위기를 조성하고 연구개발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19개 출연연을 관장하는 기초.공공.산업 기술 등 3개 연구회 조직을 총리실 산하에서 과기부 밑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물론 과기부 장관의 부총리급 격상 이후의 문제다. STEPI 민철구 팀장은 "3개 연구회가 종합조정 권한을 갖는 과기부 밑으로 들어와야 인력교류 등을 통해 연구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연구회가 예산편성과 배분 등 통합행정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덧붙였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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