康津 다산초당 영랑생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역사책 속에 상당한 무게로 자리잡은 茶山 丁若鏞.
그 유명한 『목민심서』의 저자요,한민족의 스승으로 손꼽히는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을 찾아나서면서 어려웠던 한시대를 살면서 보통사람처럼 진한 좌절과 슬픔을 느껴야 했던 그의 인간미를 우선 책으로나마 접하고 싶어졌다 .
실학자였던 그가 조선 순조 원년(1801) 당파싸움의 소용돌이 속에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에 휘말려 장장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했을때 느꼈던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채 한 시골구석에자리잡은 그의 누옥이 과연 무엇을 전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였다.
그가 유배지에서 두 아들과 형님등 가족에게 보낸 편지묶음(책『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박석무 편역)을 살펴보는 일은 약 2백년전 실존했던 인간 정약용을 느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적어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만은 아이들과 헤어진 한 아비의 애틋한 사랑과 외로움이 절절하게 실려있어 역사책 밖으로 나와 우리 주변의 흔한 범부로 자리하는 다산을 느낄 수 있었다.
유배기간 동안(강진에서만 10년)『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등 5백여 불후의 명저를 남긴 다산의 유배지는 전라도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숨어 있었다.
그 명철한 사유와 지혜를 풀어내 후세들의 심금을 울린 그의 체취를 느끼기 위해 해남 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여분간 달려 당도한 도암면만덕리 귤동마을은 한낮의 뙤약볕 아래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시골마을에 난데없이 주차장과 차량 진입을 금하는 표지판이 있는 것 외에 여타 산골마을과 다를 바 없는 이곳에도 역시 고즈넉한 시골의 정경을 망치는 시멘트 농가가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올곧게 뻗은 대나무숲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몸통이굵은 동백나무가 늘어서 있는 산길을 헉헉이며 4백여m 올랐을 때 다산초당이 나타났다.
울창한 숲사이에서 찬기운을 간직한 샘물로 목을 축이자 주변의경관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다산이 바위틈의 수맥을 직접 찾아만들었다는 이 藥泉은 지독한 더위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그의체취를 찾아 산길을 올라온 나그네의 갈증을 축여주었다.
훼철됐던 누옥을 지난 58년 다시 세웠다는 5칸짜리 단층 기와집은 조촐했고 그 옆에는 선생과 제자들이 묵었던 東菴과 西菴이 조그맣게 복원돼 있었다.
그가 10년이나 갇혀 지냈던 이곳은 당시 얼마나 깊고 험한 곳이었을까.그 옛날 유배지로 삼은 곳이었으니 사방이 정적에 묻힌 이곳에 갇혀 미친듯 읽고 쓰면서 5백여권이나 책을 펴냈을 다산의 절절한 외로움이 가슴 뻐근하게 느껴져왔다.
『나는 천지간에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서 있는지라 마음 붙여 살 것은 글과 붓이 있을 뿐이다… 내저서가 쓸모없다면 나는할 일이 없는 사람이 되니 너희들이 독서하는 것은 곧 나를 살려주는 것이다』며 자식들에게 편지를 썼던 다산.
초당 한 옆에는 그가 산속의 물을 나뭇가지를 홈통삼아 끌어들여 가꿨다는 작은 연못과 차잎을 따다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여마셨다는 반석이 옛주인을 작별한채 그가 가버린 숲을 지키고 있었다. ***마당가득한 모란꽃 초당 서쪽 뒤편 바위에는 유배가풀릴 즈음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 그가 정성스럽게 새겨놓은「丁石」이 바로 엊그제 파놓은 듯 생생하게 각인돼 있었다.부질없는 인생을 미련없이 살다 표표하게 사라져 갔을 것 같은 이가 유배지에서의 세월을 애써 바위에 기록했다 하니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오롯하게 느껴져 왔다.
동암 바로 옆으로 빠져나가면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구강포가 멀리 훤하게 내려다 보인다.다산은 유달리 심사를 가누지 못하는날 이곳에 올라와 바다를 바라다보며 어지러운 심기를 바로잡지 않았을까.
이곳에서 다시 강진읍내 군청 뒷산 입구에 있는 시인 金永郎이태어난 집에 들르는 일은 호사스러운 문화적 즐거움에 빠지게 한다.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내 한해는 다가고 말아/삼백 예순날 한양 섭섭해 우옵니다』 학생시절 그 운율에 취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한번쯤은 읊어봤을 시『모란이 피기까지는』등81편의 아름다운 시를 남긴 영랑.
1903년 강진읍남성리탑동 태생인 영랑의 생가는 그동안 여러차례 전매돼오던 것을 10년전 강진군에서 이를 매입,원형대로 복원했다.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동산 중턱에 자리한 소담한 초가집,마당에가득 심어놓은 모란꽃 등이 영랑의 詩心을 대신 노래하고 있었다. 영랑을 이름으로 알뿐 그의 詩 곳곳에 일렁이는 나즈막한 서글픔을 이해못한 사람이 세웠을 것 같은 우악스러운 詩碑를 감수성이 남달랐던 영랑이 보면 심한 알레르기반응을 일으킬 거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高惠蓮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