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노트북을열며

노 대통령의 인식 오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노무현 대통령이 또 수류탄을 던졌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다.

노 대통령은 지난 11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만나 불씨가 꺼져가는 ‘2007 남북 정상회담’ 뒷얘기를 전하면서 논란이 일 발언을 무더기로 쏟아냈다.

우선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영토선이 아니다”는 발언은 위험 수위를 한참 넘어섰다. 노 대통령은 NLL에 대해 “영토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남북 간에 합의한 분계선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된다. 헌법상 북쪽 땅도 우리 영토인데 그 안에 줄을 그어놓고 영토선이라고 주장하면 헷갈린다”고 말했다.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대다수 국제법 학자들은 위험한 주장이라고 일축한다. 박춘호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과 김찬규 경희대 명예교수 등은 “정전체제의 일부인 NLL은 국제법적으로 인정되는 실질적 해상경계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3조는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조항이라는 게 헌법학자들의 일반적 해석이다.

노 대통령이 지난 2일 군사분계선(MDL)을 넘을 때 감격해 했던 것도 헌법과 각종 법률의 효력이 북한에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남북한은 경의선과 금강산 지역에 MDL을 경계로 각각 ‘출입사무소(CIQ)’를 운영하고 있다. 남북 모두 MDL을 영토선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MDL과 함께 NLL을 얘기하면서 헌법 3조를 거론했다면 그나마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덜렁 NLL만 얘기함에 따라 남남 갈등만 조장하고 말았다.

또‘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4항에 명시된‘3자 또는 4자’에 대한 노 대통령의 발언은 무책임하기 그지없다.

노 대통령은 한반도 종전선언에 3개국 또는 4개국이 참여한다는 배경과 관련, “나중에 문안 다듬는 데 보니까 3자, 4자 이렇게 돼 있더라. 별로 관심 안 가지고 넘겼다. 3~4자라는 것은 사실 나도 별 뚜렷한 의미를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선언문에 들어간 ‘3자 또는 4자’를 놓고 미국과 중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엄청난 파장이 일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대통령은 구체적 의미도 모른 채 서명했다는 답변인 셈이다. 남북 협상 등에서 단어 하나를 놓고 밤샘 협상을 하곤 하는 정부 당국자들이 듣기에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발언이기도 하다.

그리고 북쪽의 호감을 받기 위해 아리랑 공연 때 박수를 쳤다는 발언도 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 노 대통령은 “하나라도 더 본전 찾고 가자면 북쪽의 호감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제가 박수를 쳤다”고 밝혔다.

초청을 받은 입장에서 예의상 박수를 쳤다면 그나마 이해할 구석이 있다. 하지만 합의를 더 많이 이끌어 내기 위해 호감을 받으려고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아리랑 공연 때 박수를 쳤다는 발언은 많은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다.

북한은 한민족이라는 동질성 외엔 우리와 공통분모를 찾기 힘든 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호감만으로 평화체제를 위한 합의를 선뜻 내줄 북한이 아니다. 북한의 국가 목표는 김정일 장군님의 영도 하에 그들 식 사회주의를 고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당선자 시절부터 강조한 “미국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하겠다”는 당당함을 앞세워 다소 얼굴을 붉히더라도 남북의 차이를 확인하고 인정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대통령의 인식은 국가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이 엄청나다. 대북 정책의 경우에는 차기 대통령에게 징검다리이면서 짐이 되기도 한다. 결코 쉽게 생각하고 말하면 안 되는 이유다. 국민은 조용히 마무리하는 대통령을 기대하고 있다.

이철희 정치부문 부장대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