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경제] 외국 투자가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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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20면

“시장이 침체하면 투자자들은 아주 소심해지고 우유부단해지며 자신없어 한다. 그러나 주가가 오르면 낙관적 분위기에 취해 기대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외환위기를 맞아 주저앉았던 주가가 급등세로 돌아섰던 1999년, 한 외국계 금융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기자에게 던졌던 말이다. 그는 “신흥시장 투자자들의 일반적 속성이 그렇다”고 했지만, 다분히 한국 투자자들을 겨냥한 말이었다. 당시 서울을 방

문했던 다른 외국 펀드매니저들도 습관적으로 그런 말을 했다.
사실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당시 국내 증시의 투자자들은 군중심리에 휩쓸려 뛰는 주식을 뒤쫓기 바빴다. 한 증권사 CEO는 ‘바이 코리아’ 펀드를 들고 이를 부추겼다.

그러나 요즘 미국과 유럽의 대형 금융회사와 각종 펀드 등 외국 기관투자가들의 행태를 보면 자신들이 비난했던 신흥시장 개인투자자들과 뭐가 다른지 의문이 들 정도다.
외국 기관들의 매수에 힘입어 미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이후 급락했던 신흥시장의 주가가 연일 초강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주 중국과 홍콩·인도·브라질 등 주요 신흥국 증시는 일제히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 달 전만 해도 공포에 질려 신흥시장 주식을 처분하고 있었다. 서브프라임 소용돌이가 거셌던 지난 7월 말~9월 중순 그들은 국내 증시에서만 주식 28조원어치를 팔아치웠다. 중국을 제외한 브라질과 인도네시아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매도 규모가 조금씩 차이 났을 뿐이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금리인하(9월 18일) 조치로 시장 상황이 크게 달라지긴 했다. 하지만 FRB의 개입은 어느 정도 예견됐던 사실이다. 우왕좌왕한 그들의 모습에선 분명 실력 부족과 소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하면 급락하던 순간 주식을 싼값에 거둬들인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과 같은 신흥시장 큰손들의 행보는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다.

사실 외국 기관투자가의 변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년 전인 1987년 10월 블랙먼데이 때 월스트리트를 되돌아보자. “유명한 투자은행과 자산운용사들은 매도 주문을 쏟아냈다. 뉴욕증권거래소(NYSE) 컴퓨터 시스템이 다운됐다. 어떻게 4~5일 사이에 심리가 이렇게 돌변할 수 있을까. 패닉 상태에 빠진 장내 거래인은 구두와 안경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허둥댔다. 서로 부딪쳐 나뒹구는 모습이 속출했다….” '스트리트 제국'쓴 금융역사가 존 스틸 고든의 말이다.

또 아시아 외환위기 직전인 1995~96년에 미국과 유럽의 유명 금융회사들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의 고금리에 취해 경쟁적으로 단기 자금을 공급했다. 그 자금은 고스란히 부동산시장에 투자됐다. 자산유동화 수준이 낮았던 당시 ‘단기 자금을 갖고 부동산에 장기 투자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게임이었지만, 그들은 고금리 수익에 취해 베팅을 계속했다. 결국 위기 증상이 나타나자 그들은 난파선의 쥐떼처럼 돈을 회수해 탈출했고, 일부는 큰 손실을 입었다.

지금 신흥시장으로 몰리고 있는 외국 기관 자금은 언제 또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갈지 모른다.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 투자자들이 해외 기관투자가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추종 관행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외국 기관들은 신흥시장 중에서도 유독 한국시장을 계속 외면하고 있다. 길게 보면 우리에게 행운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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