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윤이상-음악은 민족교류.화해 架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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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우리 역사상 가장 세계적인 음악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老음악가 尹伊桑씨는 喜壽의 나이에 병색이 완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처럼 철학적 깊이와 명징한 정신력이 여전히 남아 있는느낌이었다.지병인 천식과 협심증 등으로 5분이상 말을 잇기 어려웠지만 자신의 작품속에 담겨있는 민족에 대한 애정과 동양 철학적 세계를 설명하는 데에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대 작곡가로 평가받는 尹선생님은 동포들에게 음악 작업뿐만아니라 남북간 문화교류에서의 가교 역할로 더욱 유명한데.
『분단된 민족의 비극을 하루빨리 치유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해야한다는 데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단순히 예술 작가의 입장에서 보아도 문화 교류는 남북을 화해로 이끌고 보다통일에 가까이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고 생각한다.
엇갈리는 정치적 견해나 이데올로기적 선입견을 벗어나 순수한 문화행사로 펼칠 수 있는 것이 바로 음악이 될수 있다.그런 의미에서 음악을 통한 민족의 교류와 화해는 매우 중요하다.』 -尹선생님은 지난 90년 열렸던 역사적인 통일음악제도 실질적으로 주도하셨고 91년엔 남북한의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서로 어울리는 「남북음악제」를 추진하셨는데.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며 이는 남북한 정부와 사회여론까지 모두 합의를 보아야 할 일이다.북한의 김일성 주석 사후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정을 좀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그러나 남북한의 관계가 이전 어느 때보다도 나아질 가능성이 많아진 것으로기대한다.시기가 무르익는다면 남북의 문화교류는 다른 어떤 문제보다 선행되고 활발히 추진될 것이다.』 -매우 뒤늦은 감이 있으나 尹선생님의 음악을 성대히 조명하는 음악제가 9월 고국에서처음 열리게 되는데.
『우리 민족 정서를 담고 훌륭한 문화적 유산을 꽃피우겠다는 신념으로 작품을 만들어온 나로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유럽 등지에선 전문 연주자들이 따로 있을 정도로 연주회가 많이열리고 활발한 조명을 받아온 작품들이 이제야 고 국에서 정식으로 선보이게 됐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38년만에 고향에 돌아가는 심정은 표현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을 계기로 계속 고향인 한국에서 살게 되는 것은 아닌지.
『나이가 많아져 병세가 더욱 심해지는 나로서도 고향땅에 묻히고 싶은 심정은 물론이다.내가 영구 귀국하기 위해서는 정부차원에서 나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공식적인 조처가 선행돼야 한다고 본다.38년간의 외국생활 동안 모든 작품을 조국에 헌납하겠다는신념으로 작곡해왔다.이 음악유산을 조국의 후배들이 계승하도록 하고 싶다.』 -남북한의 문화 교류를 위한 구체적인 활동 계획은. 『북한의 고위당국자들과 협의한 여러 가지 사업계획은 아직발표할 단계가 아니다.남한 정부.예술인들과도 직접적인 왕래는 없었으나 조만간 전향적인 조치가 있게 될 것이며 역사적인 행사를 위해 이와 관련해서는 남북한 정부차원에서 합동으 로 발표해야 할 것이다.』 -남북음악제와 같은 문화교류의 전망은.
『남북한 양측의 음악인들은 충분히 준비가 돼있다고 본다.남북한의 문화활동을 연결시키는데 미약하나마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큰 보람이 있다고 본다.화해와 통일을 위한 문화교류에서 방해가 되는 것은 음악과 같은 순수 민족 예 술을 정치적인 가치와 편견으로 보려고 하는 것이다.남한의 문민정부는 이같은 문화교류를 충분히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여러 가지 개혁을통해 보여준 것 같다.북한의 경우도 상황이 안정되면 문화예술에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커질 것이 며 남북교류에도 더욱 힘쓰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尹선생님의 음악에서 가장 큰 특징은 우리 민족의 정서와 고뇌를 서양음악이라는 그릇에 담아냈다는것이라고 볼수 있는데.
『그동안 어디에다 내놓아도 후회없는 대작들만 약 1백50여편만들어왔는데 우리 민족과 한국의 삶을 표출하기위한 음악을 한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유럽의 한가운데에서 작업을했어도 어려서부터 배워온 음악적 감수성이나 경 험등이 무시될수없다.남달리 동양철학적인 분위기도 그저 서양음악을 배운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창조적이고 깊이있는 음악을 하겠다는 생각이투철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핀란드의 시벨리우스와 비견되는 세계적인 민족음악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尹씨는 『외국 생활이 오래 지속됐지만 그때문에 더욱 작품속에 민족성이 배어있게 됐다』고 설명한다.
-그동안 북한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북한 사정을 아실텐데 최근 북한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느낌은.
『북한에선 윤이상 음악연구소가 10년전부터 매년 음악제를 열어 내 작품들을 활발히 연주하고 있다.최근엔 내 병세가 깊어져전혀 접촉도 못했으나 金正日 정권은 20년전부터 준비된 것이기때문에 금방 안정될 것으로 추측된다.특히 문화 예술적인 측면에서는 金正日 본인부터가 매우 큰 관심을 표명해왔으므로 더욱 풍부하고 유연한 입장일 것으로 여겨진다.직접 만난 적은 없으나 金正日이 화해와 통일을 위한 문화교류를 절대로 마다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나는 음악인일 따름 이어서 정치적.외교적인 문제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56년 혈혈단신으로 유학의장도에 올라 40살의 나이에 파리국립음악학교에 입학하면서 세계적인 음악작가로 나서기 시작해 독일에선 예술원 정회원에 올랐으며 국민문화훈장을 수상하기도 한 尹씨는 38년만에 귀국하기 직전 처음 음악유학을 시작했던 그 파리에 다시 머물게 된 것이다. 여전히 경상도 말씨가 약간 남아있는 尹씨는 인터뷰 마지막에서 한국인들에게『더도 덜도 아닌 윤이상 그자체의 알맹이만 알아달라』고 당부하면서 『그 알맹이는 그냥 민족음악인일 따름』이라고 강조했다.
[파리=蔡奎振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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