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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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그날 내내 써니는 하여간 어딘가 불안해보였다.우리가 어른들 같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불안해진 것인지,불안했기 때문에 나를 혼자 있는 집으로 불러들여서 침대가 있는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간 것인지는 분명치가 않다.어쩌면 둘 다가 해 당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써니는 조울증 환자처럼 울다가 웃었고 기뻐하다가슬퍼했다.여자가 처음으로 남자를 알게 될 때 누구나 다 그러는것인지도 모르지만.
써니는 나를 꼬옥 껴안고 있거나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안겨있거나 하다가 소나기같은 입맞춤을 퍼붓기도 했고,때로는 장마같이 긴 긴 입맞춤을 요구하기도 했으며,그러다가 멍한 시선을 하고 저 혼자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
『달수 넌 이제 나한테 묶인 거야 알아?』 써니는 문득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내가 무어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다시 자기 생각을 수정하기도 했다.
『아냐,약속같은 건 유치해 그치?』 난 사실 막연하기는 했지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아 이렇게 해서 써니는 내 여자가 된 건가.나는 이제 이 애를 책임져야 하는 건가.그렇다면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그건 써니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달렸다고 나는 생각했다.무엇이 써니 를 혼돈에 빠뜨리고 있는지 모르지만,써니가 그 혼돈을 내게 떠넘긴다고 해도 나는 피하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어린왕자」와 같이 꽃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나서 어느새 소중하게 느끼게 된 꽃을 생각했던 것처럼,「어린왕자」가 「관계」를 맺은 꽃에게 했던 것처럼,나도 써니에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내 생각들을 다른 말로 말했다.
『난 말이야,죽을 때까지 여자는 너 하나밖에 모르게 된다고 해도 억울해 하지 않겠어.정말이야.』 『아냐,약속같은 건 다 유치하다니까.난 그런 약속을 원하는 게 아니라니까….』 『그럼넌 뭘 원하는 거야.』 『…….』 『우린 서로가 실습용은 아니잖아.우린 서로를 원한거라구….』 써니가 나를 응시했는데,어쩐지 아주 슬퍼보이는 눈빛이었다.써니는 그 눈빛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멍달수 넌…좋은 애야.』 써니가 생각난듯이 손을 들어 왼손에서 반지를 빼서 내게 내밀었다.
『이거 너한테 주고 싶어.…싼 거니까 부담도 없을 거야.』 나는 반지를 받아들었다.아무 무늬도 없는 금색 링이었다.내 새끼손가락에나 겨우 들어가는 굵기였다.써니가 내 왼손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나서 덩달아 입술도 주었다.
우리는 정말이지 긴 긴 키스를 했다.그렇게 세월을 다 까먹어도 아깝지 않을 입맞춤이었다.우리는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윽고 써니가 내 입술에서 입술을 떼고 말했다.
『이젠…가야 해.』 나는 다시 한번 써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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