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이쓰는가정이야기>부모의 직권남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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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아버지가 이름난 만화가니 자식들도 당연히 재능을 이어받았겠지」.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아닌게 아니라 피는 못속이는 것인지,두 아이가 유치원도 가기 전에 종이에다 휘저어대는 것이 제법 소질이 있어 보였다.
아이 보아주러 온 친척들이 애들 그림을 보고 『쟤네 아빠는 겨우 만화가로 끝났지만 얘들은 필시 희대의 남매 화가가 될 것』이라고 예언도 했다.그러나 나는 꺼림칙했다.젊은 날을 비 오고 바람 부는 뜨락만 걸어 온 내가 2세에게까지 그 참혹한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매일 아이들을 붙들어 앉히고 세상에는 그림보다 훨씬 근사한 분야가 얼마든지 있음을 주지시키며,시간만 나면 화구에서 손을 떼게끔 설득.회유.세뇌시켜 나갔다.
내 끈질긴 「원천봉쇄」가 주효해 아이들의 소질은 여지없이 퇴화되어 갔다.그리하여 마침내 오늘날,학교 성적표를 보면 두 애가 모두 미술성적이 가장 낮아 평점을 깎아먹는 문제과목으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 와서 내가 후회하는 것은 혹시 얘들이 화가가 아닌 음악가,혹은 빵집 종업원이나 연탄 배달부로 성공하는 것이 우려되는것이 아니다.
참으로 내가 부끄러워 하는 것은 「직권남용」이다.비록 내 자식일지언정 그림을 그려라 마라,노래를 해라 어쩌라 할 하등의 권리가 내게는 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집의 명령체계는 구시대 정치.경제 구조와 맥을 같이 하면서 끝없는 낙하산과 월권의 고리에 같이 물려 있었다.다시 말해서 오랜 세월을 「하지 마라,하지 마라」에 연마된 나는 家長 아닌 「절대 권부의 훈령」을 자식들 에게 하달해참극을 빚은 것이다.
그 주제에 낙조의 해변에 아이들을 앉혀 놓고 갈매기의 꿈을 읊고,죽은 시인의 사회를 노래한다고 과오가 파도에 씻겨가랴.하지만 얘들아.월드컵 축구에서 너희들도 보았지.「지은 죄」로 그라운드를 쫓겨나 11명의 선수가 10명이 되는 참 상을 입고서도 그들은 더욱 분발해 승리를 따내지 않더냐.
아빠도 오늘부터는 10명으로 싸우는 축구처럼 총력을 다해 너희들을 지켜볼 것이란다.어제까지보다 훨씬 훨씬 더 사랑하는 가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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