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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일까, 스포츠일까 근육질 사내들이 격돌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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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05면

지난 9월 29일 서울에서 K-1 월드 그랑프리 개막전이 열렸다. 최홍만을 비롯하여 씨름 천하장사 출신 김영현, 태권도 상비군 출신 박용수, 투포환 선수였던 랜디 킴 등이 참가한 개막전은 1년에 한 번 열리는 월드 그랑프리의 출전 선수 8명을 뽑는 대회였다. K-1의 월드 그랑프리 개막전이 일본 아닌 해외에서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스포츠 산업 장악한 프로 격투기

개막전에 출전할 선수들을 뽑는 대회는 대부분 해외에서 열렸지만 월드 그랑프리 본 행사의 해외 개최는 처음이다. 이는 종합격투기 대회가 지금 일본과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스포츠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는 종합격투기 선수의 승전보가 지상파 스포츠 뉴스에서도 다루어질 정도로 종합격투기는 대중화되었다. 종합격투기를 포함한 프로 격투기 산업은 이미 황금알을 낳는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선두에 선 것이다.

프로 스포츠는 ‘엔터테인먼트’
주목할 것은, K-1이나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 같은 격투기 대회들은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인 동시에 화려한 쇼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프로 축구나 프로 야구가 거대한 스포츠 산업을 이루는 것과 일맥상통하면서도, 격투기 산업은 그 핵심에 ‘엔터테인먼트’가 자리 잡고 있다.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 스포츠에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프로 야구나 프로 축구 등에서는 어디까지나 스포츠 그 자체가 본질적인 것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보다 큰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는, 농구에 3점슛이 도입되고 축구에 ‘서든 데스 제도’(연장전 도중 한 팀이라도 골을 추가하면 경기가 끝나는 제도)가 도입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고민해야만 한다. 관객이 경기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떠나가면 프로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격투기의 경우는 더욱 엔터테인먼트가 필요하다. 1990년대 초반까지 막강한 권위를 누렸던 프로 복싱은 거의 모든 국가에서 열광했던 격투기다. 하지만 마이크 타이슨 이후 중량급에서의 스타가 사라진 뒤 중남미를 제외하고는 프로 복싱의 열기가 식기 시작했다. 어떤 스포츠에서나 스타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특히 개인 스포츠에서는 스타, 그리고 자웅을 겨룰 라이벌의 존재가 막중하다. 무하마드 알리가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 등의 라이벌과 명승부를 펼쳤을 때 복싱은 전성기였다.

슈거 레이 레너드, 토머스 헌즈, 로베르토 두란 등의 영웅이 할거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영웅의 명승부는 언제나 관객의 심장을 들끓게 만든다. 하지만 전형적인 ‘헝그리 스포츠’였던 복싱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지금은 전 세계 챔피언인 최용수만이 아니라 현 세계 챔피언이었던 지인진조차 타이틀을 반납하고 K-1 무대로 뛰어드는 시대다.

격투기의 역사를 바꾼 K-1과 UFC
도대체 종합격투기가 지금 어떤 기세로 달려가고 있기에 최홍만·지인진 등의 스타 선수들이 속속 전공을 바꾸는 것일까? 그 답을 알기 위해선 일단 K-1이 무엇인지, UFC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의 K-1과 미국의 UFC는 모두 1993년에 첫 대회가 열렸다.

두 대회의 성격은 아주 달랐다. K-1은 서서 싸우는 입식 격투기의 최강자를 가른다는 의미에서 가라테, 쿵후, 킥복싱 등의 첫 알파벳(K)을 따서 이름이 지어졌다. K-1을 만든 정도 회관은 이미 1988년부터 가라테의 대중화를 위해 링과 글러브를 채택하는 혁신을 이루었다. 그리고 모든 유파를 막론한 입식 타격기의 제왕을 가르자는 의미에서 K-1을 만든 것이다. 첫 대회에서는 크로아티아의 브랑코 시가틱이 우승했고 이후 어네스트 호스트, 피터 아츠 등의 스타를 배출했다.

UFC는 미국의 덴버에서 첫 대회가 열렸다. UFC는 K-1과 달리 입식 타격기만이 아니라 유도와 주짓수, 레슬링 등 모든 무술과 격투기를 망라하는 종합격투기 대회였다. 첫 대회에서는 마치 무림의 최고수를 뽑는 것처럼 킥복싱, 레슬링, 가라테, 주짓수 등 자신의 유파를 전면에 내세운 선수들이 토너먼트를 벌여 흥미를 끌었다. 1회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는 그레이스 주짓수의 호이스 그레이시였다. 주짓수는 일본의 유술을 말하는 것으로, 그레이시 주짓수는 유술이 브라질의 그레이시 가문에 전해져 확립된 유파를 말한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조그만 체구였던 호이스 그레이시는 상대방을 그라운드로 끌어들여 순식간에 꺾고 조르는 관절기로 승부를 냈다. UFC를 본 관객들은 왜소한 체구의 호이스 그레이시가 거구의 선수들을 순식간에 제압하는 광경에 감탄했고, 종합격투기와 주짓수가 미국에서 인기를 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초기만 해도 깨물거나 눈과 급소를 공격하는 등 최소한의 반칙만이 금지되었던 UFC이지만, 폭력성이 논란이 되자 누운 상대의 머리를 발이나 무릎으로 공격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스포츠로서의 규칙을 중시하고 있다.

야수의 육체, 사냥꾼의 본능
흥미로운 것은 UFC가 채택한 옥타곤이라는 경기장이다. 링에서 벌어지는 많은 격투기와 달리 UFC는 팔각의 철망 안에서 경기를 한다. 철망 안에서 벌어지는 격투기 대회를 보면, 마치 로마시대의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이 싸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로마의 관중들이 원형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혈투를 보며 흥분과 감동을 느낀 것처럼, 지금 전 세계의 관객들은 옥타곤 안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격투에 빠져들고 있다. 그 이유는 어쩌면 간단한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원초적인 싸움의 형태가 권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권투는 전형적인 스포츠로서 만들어진, 대단히 정제되고 순수한 격투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시대에 최초로 행해졌던 스포츠의 하나는 판크라시온이었다. 주먹으로 치고받다가 서로의 몸을 잡고 던지거나 조르는 격투기. 그것은 원시시대에 인간이 맹수와 싸우기 위해 익힌 생존의 무술이기도 했다. 무기를 들고 싸우다가 맨손이 되었을 때, 인간이 택할 수 있는 것은 온몸을 이용하는 격투다.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 ‘옹박-두번째 미션’에서는 무에타이가 전쟁무술로서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치고 때리는 것만이 아니라 적의 팔과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은 무에타이의 중요한 기술이었다.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서는 타격기 이상으로 관절기가 중요해진다. 주짓수 역시 무사들이 배웠던 전쟁무술에서 유래한 것이다.

유술이 스포츠로 변화한 것이 유도라면, 실전무술의 형태로 남은 것이 주짓수다. 이처럼 종합격투기는 인간의 투쟁본능을 자극하고, 스포츠 이전의 짜릿한 희열까지 느끼게 한다.

가장 단순한 규칙을 가진 스포츠의 하나인 축구를 놓고 ‘전쟁’이란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다. 아니 아예 ‘축구는 전쟁이다’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기도 한다. 고대에는 적의 머리를 공으로 이용했다는 것처럼 축구라는 스포츠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격렬하게 관객의 심장을 뜨겁게 달군다. 격투기 역시 마찬가지다. 잔인하다거나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외면당하기는 했지만, 사실 격투기야말로 ‘전쟁’이란 단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스포츠다.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갈고닦아 상대방을 제압할 뿐인 격투기 선수의 동작은 우아하고 섬세할 뿐 아니라 파괴적이고 서늘한 쾌감을 준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능, 살아남기 위해 사냥을 하는 육식동물의 본성이다. 권투가 신사적인 스포츠라면, 격투기는 육체를 가진 인간의 생존을 위한 싸움터인 것이다.

쇼+드라마=프로 레슬링
사실 종합격투기 이전에 이미 스포츠 엔터테인먼트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격투기가 있다. 그것은 한국에서는 거의 고사(枯死) 상태에 들어간 프로레슬링이다. 한국에서는 프로레슬링이 공정한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가 아니라 쇼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인기를 잃어갔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는 다르다.

1980년대 WWF(지금은 WWE로 바뀐)의 회장 빈스 맥마흔은 프로레슬링에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강화하면서 더욱 인기를 끌었다. 단순히 승부를 미리 결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선수들 간의 대립과 연대, 심지어 애정관계까지 모든 것을 스토리 라인에 포함시켜 ‘남자들의 소프 오페라’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드라마적인 요소를 강화했다.

그러다 보니 레슬링 기술이 가장 뛰어난 선수가 챔피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카리스마가 있고 링에 올라 말로 관객을 휘어잡는 선수가 더욱 인기를 끌며 최고의 스타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프로레슬링은 90년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최고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로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동물보호협회(WWF)와의 분쟁으로 WWF(World Wrestling Federation)에서 WWE로 명칭을 바꾸었지만, 오히려 ‘World Wrestling Entertainment`란 이름은 프로레슬링의 쇼로서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사실 프로레슬링을 온전한 격투기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미 승부가 결정된 게임을 스포츠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프로레슬링은 다른 의미에서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다. 프로레슬링을 보는 것은, 뛰어난 각본가들이 만들어낸 남자들의 드라마를 보는 동시에 잘 훈련된 레슬링 선수들의 기술을 감상하는 것이다. 이미 짜고 하는 것일지라도 손발이 잘 맞고 기술이 뛰어난 선수들의 움직임은 거의 서커스를 보는 것처럼 현란하다. 미스터 코리아 대회에서 남자들의 근육만을 감상하는 것도 즐거운데, 육체를 극한까지 단련시켜 갖가지 기술을 서로 주고받는 ‘쇼’를 왜 마다하겠는가.

현대의 프로레슬링이 비록 ‘쇼’를 전면에 내세우긴 하지만, 그래도 근본에 깔린 것이 격투기란 사실은 결코 외면할 수 없다. 스포츠와 쇼가 어중간하게 섞여 있던 일본의 프로레슬링에서는 그런 근본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가끔 있었다. 1984년에 실전 레슬링을 표방하는 UWF라는 단체가 있었다. UWF는 일 년 남짓 활동을 하다가 해산되었지만, 이후 링스나 판크라스 등 격투기 단체가 만들어지는 토대가 되었다.

지금 K-1의 종합격투기 브랜드인 K-1 히어로즈의 수퍼바이저를 맡고 있는 마에다 아키라가 바로 UWF의 수장이었고 링스를 만든 인물이었다. 또한 UWF의 일원이었던 다카다 노부히코는, 한때 한국 격투기 팬들이 열광했던 종합격투기 대회 프라이드의 핵심 인물이었다. 지금도 K-1 히어로즈에 일본의 프로레슬러가 참전하고, 사쿠라바 가즈시나 미노와맨 등이 스스로 프로레슬러임을 강변하는 것은 그런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프로레슬링이 단순한 쇼가 아님을 주창했고, 프로레슬러가 최강이라는 신념으로 종합격투기계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프로레슬링은 각본에 의해 움직이는 인형들의 쇼가 아니라 육체를 최강의 상태까지 끌어올린 선수들이 기술을 주고받으며 관객에게 최상의 ‘쇼’를 보여주는 무대인 것이다.

지금 미국에서 UFC가 인기몰이를 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프로레슬링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지난해 WWE의 매출은 약 4억 달러, 순이익은 4700만 달러에 달한다. 상장기업이 아닌 UFC의 매출은 약 2억 달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료시청 채널에서는 UFC의 수익이 WWE를 앞서지만 매주 로, 스맥다운, ECW 등 다양한 이벤트가 벌어지는 WWE의 수익이 더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캐릭터를 이용한 피겨나 각종 게임 등 관련 상품의 수익도 WWE가 더욱 많고 최근에는 할리우드에도 진출하여 스톤콜드 오스틴, 존 시나, 케인 등 레슬링 스타의 캐릭터를 활용한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문명의 아이러니를 반영하는 격투기
프로레슬링과 종합격투기는 격투기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방향 자체가 다르다. 프로레슬링은 철저하게 ‘쇼’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맞추어져 있다. 영웅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음모와 반전이 잘 갖추어진 이야기가 관객을 사로잡는다. 반면 종합격투기의 핵심은 승부 그 자체다. 프로레슬링처럼 라이벌 관계를 부각시키고 배신과 복수의 드라마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모든 것은 승부에 달려 있다. 결국은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지게 된다. 미르코 크로캅이 아무리 인기가 있다고 해도 두 번 연속으로 지고 나면 열기가 식어버린다. 3연패라면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에도 예외는 있다. 지더라도 화끈하게 지는 것이 인기를 끈다. 대중이 종합격투기에서 원하는 것은 지루하게 상대방을 물고 늘어지는 파이터가 아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한 번의 시합에서 불태우는 근성 있는 파이터를 좋아한다. 지더라도 스타가 될 수 있다.

K-1이건, UFC이건 결국은 스타를 팔아먹는 것이다. 스타가 있어야만 시청률이 오르고, 시청률이 올라야만 수익을 올릴 수 있다. UFC는 ‘얼티밋 파이터’란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선수들을 육성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대중의 스타로 만드는 전략을 택했다. 그 전략은 여지없이 성공하여 포레스트 그리핀, 크리스 리벤 등 영웅이나 악동, 어떤 방식으로든 대중의 관심을 끈 스타들이 배출되었고 지금 UFC를 받치는 튼튼한 기둥이 되었다. 단순히 시합 하나만을 통해서 관객을 끌어들이는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스포츠는 이미 엔터테인먼트의 영역에 포섭되었고, 그중에서도 종합격투기는 제일 다양한 방식으로 엔터테인먼트를 만들어내고 있다. 가장 치열하고 전투적인 스포츠인 종합격투기가 엔터테인먼트성이 가장 강하다는 것은 과연 아이러니일까? 사실 아이러니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이 이룩한 문명 자체가 아이러니라는 방증 아닐까? 인간은 문명을 이룩했지만, 우리는 아직 본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유희이건, 살육이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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