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정책분석/핵·식량·체제정비 모두 시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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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과제/대외개방 범위·속도조절 고심/대미관계 방향설정도 큰 문제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50년 통치의 권력을 남겨주었지만 그에 따른 수많은 문제점과 과제를 유산으로 물려줬다.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경제난 등이 그것이다.
김정일이 신속하게 자기 체제를 굳히더라도 이러한 난제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경우 생각보다 훨씬 빨리 어려운 상황에 봉착할 수도 있다.
◇핵개발 계획=가장 큰 과제는 역시 핵문제다.북한은 일련의 핵협상이 모두 김정일의 지도로 추진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근 대결국면을 협상국면으로 전환시킨 것은 김일성의 작품으로 보인다.
○협상가능성은 커
김정일이 김일성의 정책전환을 그대로 수용할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3단계 북―미 고위급회담과 남북정상회담을 그대로 계속하고 싶다고 미국에 메시지를 보낸 것을 보면 일단 협상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미국이 「핵 과거」를 따지고 든다면 선택하기 어려운시험에 빠지게 된다.
미국의 약속이행을 보장할 최소한의 지렛대가 필요하고,김일성주석때보다 물러서기 어려운 입장이다.그렇지만 이번에 실패하면 정말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도 있다.
◇경제난=체제 안정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몇년째 계속되고 있는 식량문제 해결이다.북한은 지난해 6백50만t의 식량을 생산했다. 그 정도라면 절대량이 2백만∼3백만t 부족하다.
통상 4년분의 식량을 비축해두나 이것이 최근 3년분으로 줄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부족분은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가져와야 한다.동남아에서는 최소한 물물교환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하므로 무상원조나 융자가 가능한 중국에 손을 벌릴 가능성이 크다.
○에너지 중국 의존
에너지도 마찬가지로 중국에 의존해야 한다.이 경우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커지는 부담을 안아야 한다.
다른 방법으로는 군량미를 꺼내고,군사훈련에 쓸 기름을 아끼는 것이다.따라서 중장기적으로는 남쪽에 대해 획기적인 군축안을 제안할 가능성이 있다.
○군축안제안 가능
◇체제 정비=장례식이 치러지기도 전에 충성서약이 시작되고,당중앙위를 소집한 것은 이것이 가장 시급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김일성체제」를 「김정일체제」로 바꾸기 위해 우선 기층당조직부터 중앙당까지 「검열지도사업」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과정에서 충성도가 약한 사람의 탈락이 불가피하다.군조직도 마찬가지다.
당에서 군에 검열단을 파견하고,군 총정치부에서도 별도의 검열을 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인적 정리 폭이 강화되면 반발세력을 만들게 되고,너무 미지근하게 마무리되면 조직을 다잡을 수 없게 되므로 조심스럽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 문제도 남아있다.
◇대외 개방=김일성시절 이미 북한은 나진―선봉개방을 준비해왔다.
이제 개방을 되돌릴 수는 없다.폐쇄정책으로 돌아설 경우 경제 테크노크라트들이 반발할 것이 분명하다.주민들도 개방을 알고 있고 대외관계 강화를 위해서는 개방이 불가피하다.문제는 개방의 범위와 속도다.
조금만 잘못 조절하면 순식간에 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새로운 체제를 만들어가는 초기여서 더욱 신중하고 제한적으로 접근할 것으로 예상된다.
외교적으로 김정일은 새로운 시험을 받아야 한다.미국과의 관계개선이 외교의 최우선 과제다.
미국이 상호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정도만 허용하면 북한은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일본도 수교협상에 적극 나설 것이고,50억달러상당의 식민지 지배 배상금은 경제문제를 해결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과 서방이 성급하게 개방을 강요하는 인상을 줄 경우 체제붕괴를 위한「평화이행전략」으로 보고 지원을 오히려 경계할 가능성도 있다.〈김진국기자〉
◎경제/실용노선 채택 점진적개방 유력/군수산업 민영화 가능성도 점쳐
수렁에 빠진 북한 경제를 구하는 일은 권력 승계작업 다음으로 시급한 김정일의 과제다.
○4년간 적자성장
70년대 중반부터 침체현상을 보이기 시작한 북한경제는 90년대초 구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더욱 가중된 에너지및 식량난으로 최악의 상태를 맞아 90년 이후 4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보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경제난을 그대로 방치해 두고서는 인민들의 지지는 커녕 반발에 봉착할 수도 있다.
가뜩이나 김일성에 비해 정통성이 약한 김정일이 기댈 언덕은 역시 경제를 회생시켜 인민을 배불리 먹이는 수밖에 없으며,그가 구소련등 동유럽에서 배운 테크노크라트들의 도움을 받아 개혁과 개방을 가속화하는 것이 필연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아직 김정일이 경제를 포함한 정책운용 방향을 밝히지 않았고,경제를 끌어갈 면면들의 윤곽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일성이라는 카리스마가 사라진 상황,김정일의 경제관,그 주변의 경제관료,북한의 경제적여건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때 어떤 면에 주력할 것인지에 대한 대체적인 그림은 그려진다. 결론부터 말해 북한경제 전문가들은 김정일이 개혁과 개방을 축으로 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택하되 점진적인 중국식 개방을 따를 것이라는데 의견일치를 보고 있다.이호 통일원 국장(제1정보분석관)은 『북한은 어려운 경제문제를 외교로 풀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김정일이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개발을 가속화하는 등 개방 속도를 높이겠지만 경제노선의 기본방향은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그러나 김정일의 부상과 함께 70년대말부터 급성장한 김달현 전부총리·이성대 대외경제위원 장·김정우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장·홍석형 국가계획위원회위원장등 전문관료들은 실용주의적 성향이 강해 사회주의 경제의 폐단을 잘 알기 때문에 개방 속도가의외로 빨라질 수도 있다.
정진철 삼성물산 부장은 『김정일은 기본적으로 실용주의자이며 북한의 40∼50대는 동유럽에서 배운 테크노크라트들이기 때문에 개방 속도가 의외로 빠를수도 있다』고 점쳤다.
하지만 김정일은 당분간 김일성의 경제노선을 한칼에 끊어 버리기보다는 오히려 강화해 나가는 가운데 개방속도등을 조절할 것이란 지적도 있다.
아버지 노선을 버리자니 자기 스스로 정통성을 부인하는 꼴이 되고 집안단속만 하자니 주민들의 경제적 불만이 누적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개방과 체제유지의 틈바구니속에서 상당기간 고민을 계속할 것이란 얘기다.
○집단농장 없앨까
동용승 삼성경제연구소 주임연구원은 『북한은 김일성이 주창한 무역·경공업·농업등 3대 제일주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다만 그동안 경제발전 과정에서 소외된 군부를 무마하기 위해 일부 군수산업을 민수로 전환하는 정책을 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그러나 관심을 끄는 것은 북한이 과연 집단농장 제도를 없애는등 완전한 의미에서 중국식 개방을 할것이냐 여부다.
심성섭 한국산업연구원(KIET)동북아 실장도 『권력구조 재편과 대미관계등 정치적인 향배에 따라 경제운용구조도 상당히 달라질 것』이라면서『체제유지가 발등의 불인 북한으로서는 중국식 개방을 따른다 하더라도 그 폭은 훨씬 좁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농업분야 문외한
한편 김일성대학 정치경제학과를 나온 김정일은 경제전문가라기 보다는 조직가요,사상전문가라 할 수 있다.
70년대부터 과학기술의 발전을 강조하고 80년대 들어 경공업 발전3개년계획을 세우는 등 경제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야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정리돼 있지만 실물경제에 그리 밝지 않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경공업·과학기술·군수산업등이며 농업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워 그동안 김일성이 주로 현장지도를 해왔다.
결국 김정일의 경제정책 방향은 당분간 제한적인 부분개방을 계속하다 미국·일본등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점차 개방의 폭을 넓혀가는 수순을 밟아 나갈것으로 전망된다.〈박의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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