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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이 잡문이라고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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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시인과 소설가들의 다양한 산문 출간이 이어지고 있다. 출판계에서는 산문을 시장 잠재력이 큰 기획물로 여기고 있는 데 비해 문단에서는 그저 ‘잡문’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예로부터 우리의 문학적 전통은 시를 숭상하고 산문을 다소 경시하는 풍토가 있었다. 이런 경향은 근대 이후 우리 문학 전통에서 고착화된 느낌이다. 그러나 산문에도 여러 층위가 있고 사유를 글로 실어 나르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따라서 산문을 폄하하거나 여가용 글로 치부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마침 독일의 문예학자 발터 벤야민의 뛰어난 산문집 『베를린의 어린 시절』이 새롭게 번역돼 나왔다. 다시 만난 감흥에 사로잡혀 그 산문들을 읽었다. 그의 또 다른 산문집 『일방통행로』도 번역돼 더욱 반가웠다.

『베를린의 어린 시절』은 제목에서도 이미 드러나 있듯이 1892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저자가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적은 글이다. 그런데 그 생각의 깊이가 범상치 않다. 그 연령대의 여린 시선이 있는가 하면 추억에 대한 강철처럼 질긴 시선도 있다. 그 가운데 ‘나비 채집’이란 글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매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우리는 여름방학의 여행과는 관계없이 주위에 있는 피서용 별장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나비 채집을 시작할 때 가지고 다녔던 큰 통을 쳐다보면 나는 으레 그때와 어린이 방의 벽을 기억하곤 한다. 어쩌면 나는 넓은 숲 속의 황야에서 나비들을 날 수 있도록 도와주던 바람, 향기, 잎 그리고 태양의 음모에 무기력하게 대항하였는지 모른다.”

이런 구절들을 읽으면 철없던 지난날이 마치 온몸으로 달려들 듯하다. 나비를 잡으러 산과 들로 다니느라 밥 먹는 것도 잊어버렸던 그 시절. 그런데 벤야민은 그저 그런 체험을 기록만 한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통찰을 얻었다. 어린 시절의 말과 성년이 된 다음의 말이 같은 말이 아님을 통찰해 낸다. 어린 시절의 말은 오늘날 생각해 보면 도저히 해명할 수 없는 무엇이었으며, 그로써 유년기의 언어들은 성인의 그것들과 대립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말은 어느새 훼손되고 언어는 타락해 우리가 유년의 감정을 잃어버리게 됐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했던 말이 성인이 돼 하는 말과는 다른 층위의 말임을 이토록 실감나게 적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어린 시절 구사했던 노랫말을 모두 잊고 살고 있다. 산문은 이처럼 글쓴이의 독특한 경험이나 사고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장르인 것이다. 그의 책과 매춘부에 대한 또 다른 산문 『13번지』의 일절을 함께 읽어보자.

“1. 책과 매춘부는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다. 2. 책과 매춘부는 시간을 헷갈리게 만든다. 밤을 낮처럼, 낮을 밤처럼 지배하는 것이다. 4. 책과 매춘부는 예로부터 서로에 대해 불행한 애정을 품고 있다. 5. 책과 매춘부 양자에게는 저마다 이들을 갈취하고 괴롭히는 남자들이 달라붙어 있다. 책에는 비평가들이. 9. 책과 매춘부는 진열될 때 등을 보이는 것을 좋아한다. 10. 책과 매춘부는 많은 후손을 만든다.”

재미있지 않은가? 늦은 밤 이 글을 읽다가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다. 이 글을 읽고 책을 실질적이지 못하다고 백안시하는 태도 못지않게 맹목적으로 책을 신성시하는 태도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새삼 알게 됐다. 이러한 산문이 시나 소설에 비해 열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우리 산문 문학이 훨씬 더 활성화돼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예컨대 우리나라 대표 시인 김수영의 산문은 그의 시만큼 강력하고 매혹적으로 독자를 융숭한 사유의 길로 이끈다. 좋은 산문을 쓰는 작가들이 그리 많은데 그들이 들인 공력에 비해 산문은 늘 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시나 소설처럼 형식과 구조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사유를 펼칠 수 있는 산문이야말로 글의 제 맛을 알려주는 장르다. 가을은 산문 읽기에 좋은 계절이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