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수행' 재계 총수들 수난사(?)

중앙일보

입력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정치·경제외교'의 재개를 위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방문길에 올랐던 2004년 9월. 당시 노 대통령을 수행했던 이건희 삼성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구본무 LG회장, 최태원 SK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등 주요 재벌 총수들에 대한 '의전'을 놓고 작은 헤프닝이 벌어졌다.

러시아 현지에서 대통령 일정을 따라 나선 재계 총수들이 작은 미니버스 한대에 웅크리고 앉아 함께 이동하는 보기 드문(?) 모습이 펼쳐지면서 "고령의 재계 거물들을 너무 가볍게 대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벌어진 것. 특히 '회장님'을 잘 모셔야 했던 주요그룹의 비서진들은 이같은 상황에 크게 당황해 하면서 그야마로 좌불안석이었다고 한다.

당시 대통령 순방에는 주요 그룹 총수 외에 강신호 당시 전경련 회장, 김재철 무협 회장, 박용성 당시 대한상의 회장, 이수영 경총 회장, 김용구 당시 중소기업중앙회장 등 재계 거물들이 대거 동행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당시 상황을 놓고 보면 대기업 회장들 스스로는 대통령을 수행하는 입장이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 분들을 모셔야 하는 우리들 입장에선 솔직히 당황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라고 기억을 떠올렸다.

다른 재계 관계자도 "현지의 한 거래처로부터 '세계적인 기업 총수들이 작은 버스에 떼로 타고 다니는 모습이 이상하다'는 반응을 듣기도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참여정부 초기 반기업적 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던 재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를 두고 "기업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불만들이 나오기도 했다.

결국 대통령 순방이라는 '국익'이 더 우선시 되는 상황인데다, "재계 총수를 그럼 떠받들고 다녀야 하냐"는 역비판까지 제기되면서 하나의 헤프닝으로 끝났지만 재계에서는 한동안 회자된 일대 사건이었다.

이같은 전례 없는 상황을 이미 겪었던 '학습효과'라도 있어서일까.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노 대통령의 이번 방북에 동행한 재계 총수들을 바라보는 해당기업 관계자들의 반응도 한결 누그러졌다.

방북 전에 만난 한 대기업 고위 관계자는 "회장께서 40여명이 넘는 다른 경제계 인사들과 함께 수행원도 없이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려면 아마도 힘이 많이 드실 것"이라고 걱정하면서도 "하지만 다들 비슷한 상황인데다 정상회담의 중요성, 북한상황의 특수성 등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재계 총수라고 해서 정치, 사회 등 다른 사회 각계 각층의 수행원들에 보다 더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회장님을 그림자처럼 수행해 왔던 대기업 관계자들 입장에서는 내심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북한에 갔던 총수들이 돌아온 지난 4일 밤 청와대 연무관 앞 풍경을 보면 더욱 그렇다. 현장에는 대부분의 기업 고위 관계자들이 회장을 영접하기 위해 초저녁부터 대거 나와 초조하게(?) 서성거렸다. "회장을 혼자 보낸 소감이 어떠냐"는 짓궂은 질문에 한 대기업 임원은 "대통령 순방인길인데…"라고 말끝을 흐리면서도 "오늘 저녁도 못 드셨다고 하던데"라고 말했다.

실제 상당수 재계 관계자들은 이날 저녁 도라산 남북출입관리사무소에서 열린 노 대통령의 방북보고를 생중계로 지켜보면서 간간이 TV에 비친 회장들의 안색을 통해 건강여부 등을 자세히 살폈다는 후문이다.

수행원 없는 재계 총수들의 이번 대통령 수행은 결국 "저녁은 드셨냐"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아직 못 먹었다"는 답과 함께 끝을 맺었고, 현장에 나온 기업 관계자들은 회장이 수행원과 재회(?)해 승용차를 타고 자리를 뜬 뒤에야 하나둘씩 흩어졌다. 【서울=머니투데이/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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