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저를찾아서>3.니버의 생애와 사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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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라인홀드 니버는 1920년대부터 50년대까지 미국 최고의 지성으로 군림하면서 미국 사회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인물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학자적 수업은 받지 않았다고 볼수 있다.신학에서도 그는 1915년에 예일대에서 취 득한 석사학위가 마지막이었다.
니버는 명문 예일대를 졸업하던 해 박사과정은 팽개치고 곧바로디트로이트에 있는 벧엘복음교회 목사로 들어가 13년을 지낸다.
이때 그가 디트로이트로 가지 않고 신학수업을 계속했다면 지금 알고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로 남았을 것이다 .
미국 자동차산업의 본거지인 디트로이트에서의 목회활동이 그의 생애를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신학과 사회문제의 접목이라는 니버 특유의 철학이 이때 배태되었다.
1928년 목사에서 유니언신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긴 그는 미국내 대학캠퍼스에서 가장 많이 불려다니는 존경받는 강연자의 명예를 누리기도 했다.한스 모건소같은 유명정치학자들까지도 당시 니버에 대해『미국 최고의 살아있는 정치학자』라는 평가를 내리는데 주저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정치학계에서까지 추앙을 받았다. 독일에서 이주해 온 니버의 아버지 구스타프 니버도 목사였으며 두 살 아래인 동생 헬무트 리처드 니버 역시 형에 버금가는신학자로 미국 현대윤리사상사를 지배했던 인물이다.
1892년 미주리州 라이트시티에서 출생한 니버는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활동을 할때만해도 여느 목사와 다름없이 폭력사용에는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였다.그러나 디트로이트에서 노동자들의 궁핍한 생활등 사회현실을 경험하면서 그의 성향은 과격하게 변해갔고 현실주의로 급선회했다.이런 그의 현실주의적인 신학관은 대학으로 옮기고부터 활짝 피어났다.
독일에 나치정권이 들어섰을 때 니버가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히틀러와의 전쟁을 지지하도록 설득한 것도 바로 그런 맥락이다.당시 니버의 판단으로는 나치야말로 전쟁이란 惡보다 더 위험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2차대전후 니버는 美국무부의 정책입안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미국의 반공정책이 그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1952년에 발표된『미국 역사의 아이러니』(The Ironyof American History)도 미국의 반공정책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그러면서도 그는 이 저서에서「미국은 특별한 미덕을 지녔다」는 우월주의와 자기 정당화 를 위한 전쟁에 대해서는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베트남전쟁에 대해서도 그는 뒤에 태도가 바뀌긴 했지만 초기에는「2차대전후 신생독립국들에 대한 미국적 해결방법」이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니버는 정치활동에도 꽤 적극적이었다.초기의 정치활동은 순전히사회주의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사회주의자당(Socialist Party)의 당원으로서 공직에도 몇번 출마했던 그는 미국대외정책에 대한 사회주의자당의 불개입원칙과 평화주의적 입장에 반발,탈당했다.그후 40년대에는 좌익성향의 반공정치조직을 결성하기도 했으며 한때 뉴욕州의 자유당(Liberal Party)부의장직을 맡기도 했다.
1952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공적활동에는 많은 제약을 받았으나 그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과 저술활동만은 계속했다.독설가로 이름이 높지만 학생 사랑만은 지극해 말년에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학생들의 논문을 일일이 지도한 그의 일화 는 지금도 전설로 남아 있다.불편한 몸을 이끌고도 유니언大에 10년을 더몸담았던 그는 유니언大 재직 33년만인 60년에 은퇴했다 지난71년 79세를 일기로 매사추세츠州 스톡브리지에서 숨을 거두었다.니버가 남긴 저서는『도덕적 인간 과 비도덕적 사회』『미국 역사의 아이러니』외에도 『기독교와 권력정치』『인간성과 인간의 운명』등 20여권을 헤아린다.
〈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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