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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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 방에서 혼자 자는 거니.』 나는 하나마나 한 소리를 했다.아무 소리도 안하고 있으니까 분위기가 점점 더 어색해져서 그런 거였다.써니가 책상 위의 스탠드를 켜고 다시 침대 허리에걸터앉으면서 싱겁다는듯이 웃다가 말했다.
『그래 난 이 침대에서 혼자 자.왜…?』 『아니 그냥…너 벌써 이런 거 보니?』 나는 책상 한구석에 놓여 있던 여성지를 집어들었다.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장님 선글라스를 쓰고 누워있는 옆에「신세대 미혼여성을 위한 여성지」라고 쓰여 있었다.책장을 몇페이지 넘기는데 속옷만 입은 싱싱한 여자들이 온갖 자 세를 취하고 있었다.여성지들은 다 그랬다.
『참 그거 이리 줘봐.아주 재밌는 게 있더라구.』 써니가 손을 내밀길래 내가 여성지를 써니에게 건네주었다.써니는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여자가 표지에 나와 있는 여성지를 펴면서 침대 위에 엎드렸다.
『이리 와서 봐.여기 엎드리면 되잖아.』 써니가 가리키는대로나도 써니의 침대에 엎드려서 신세대 미혼여성을 위한 여성지를 같이 보았다.써니가 편 부분은「처녀처럼 보이는 법」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그이를 위한 테크닉-3」이라고 돼 있었는데,그러니까 테크닉 시리즈의 세번째 기획기사인 모양이었다.
『왜 니가 이런 걸 봐야 해?』 내가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써니와 나는 나란히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써니의 얼굴이 바로내 코 앞에 있었다.써니의 옆머리에 가려서 써니의 뺨이 잘 보이지 않았다.
『넌 이런 책 안보니?』 『아니 나도 사실은 이런 거 좋아해.영석이네 집에 가면 누나들이 보는 여성지가 많거든.한번 가면난 몇달치를 한꺼번에 다 보지.그래 나도 이런거 무지 좋아한다구.그렇지만…써니 너도 말이야…벌써…처녀인 척 해야 하는 거야?』 『어떨 거 같애?…확인해보고 싶은 거니.』 나는 속마음을들킨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써니가 또 말했다.
『진짜 처녀면 뭐하겠어.처녀처럼 보이지 않으면 처녀가 아닌 거지 뭐.가짜라두 처녀처럼 보이면 처녀인거구 말이야.세상이 이렇게 돼버리니까 아주 복잡해지는 거야.그러니까 괜히 걱정이 되잖아.그래서 이걸 자세히 읽어봤거든.근데 더 걱정 인 거 있지.난 이렇게 할 자신이 없거든.여기 봐봐.너무 흥분하면 안된다는데…난 전에 너하구 뽀뽀 할 때도 너무나 기분이 이상했거든…큰일이잖아.』 『가짜 처녀 식별법,뭐 그런 게 또 남자들이 보는 잡지에 나올거야.그러니까 넌 걱정 안해도 될 거야.』 써니와 나는 얼굴을 마주보면서 웃었다.내가 손을 들어서 써니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그랬더니 써니의 얼굴이 잘 보였다.
써니의 얼굴이 붉게 익어 있었고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못하고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 다.하도 조용해서 가는 숨소리까지가 다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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