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61. 교무처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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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83년 말 필자(右)가 국회 경과위원들에게 MRI 영상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KIST 이순재 영상담당 제공]

40년 가량의 나의 교수 생활 중 감투다운 감투는 1981년 KAIST에서 맡은 3개월 간의 교무처장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교무처장 자리는 KAIST의 서열로 원장 다음이었다. 이를 테면 부원장 격이었다.

이 자리는 몇 년 전 타계한 최형섭 전 과기처장관이 장관에서 물러난 뒤 KAIST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내게 강권한 것이었다. 타계한 화학과의 전무식 교수가 추천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당시 나는 그럴 리도 없겠지만 미국 큰 대학의 총장을 하라고 해도 할 생각이 없었을 때였다. 최 전 장관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최장수 과기처 장관을 역임하는 등 한국의 과학기술 초석을 다진 사람이다. 청렴하면서 업무 추진력이 뛰어났고, KIST와 KAIST설립, 대덕연구단지 건설을 주도했다. 최 원장의 KAIST를 키워야 한다는 열정이 내게도 ‘전염’돼 하는 수 없이 교무처장을 맡았다.

최 원장은 내게 교무처장을 맡기면서 교수 승진과 신규 임용 규정을 미국 수준으로 바로잡아달라고 주문했다. 그 당시에는 제대로 된 규정이 없었다. 기껏 있어봐야 박사학위를 가지고, 공무원 임용에 결격 사유가 없어야 한다는 식의 외형적인 자격 기준이었다.

미국 수준이라는 것이 우리 수준과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KAIST에 있었지만 직장의 ‘본적’은 미국의 컬럼비아대학에 속해 있으며, 미국 대학 사회에서 치열한 경쟁을 치뤄오지 않았는가. KAIST 교수들의 연구 실적을 들여다 봤다. 거기에는 과학기술논문색인(SCI)에 비준하는 학술지에 등재된 해외 학술지 논문을 발표한 실적이 가뭄에 콩나듯 했다.

당시 KAIST 교수들은 국내 교수 중 최고 대접을 받고 있었다.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교수로 임용된 사람도 많았다. 어떤 교수들은 연구의 기본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것 같았다.

먼저 정교수 승진 심사 규정부터 고쳤다. 정교수가 되려면 최소한 SCI급 국제 학술지에 5편 이상 논문을 발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나이든 교수들의 반발이 시작됐다. 타계한 C교수, A교수 등이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렇게 수준을 높게 잡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했다. 사실 지금이야 웬만한 대학의 교수들도 정교수 심사를 받을 때쯤이면 이만한 실적을 다 쌓고 있다.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당시는 안 해보던 것이고, 한편으로는 사실상 어려웠던 것이어서 두려워 반대했다. 이 조치는 내가 3개월 만에 교무처장 자리를 내놓는 바람에 유야무야 됐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결국 보강됐다.

두 번째 조치는 박사학위 논문도 국제학술지에 발표해야 통과시켜주자고 했다. 미국의 명문대학들은 다 그렇게 한다고 내가 밀어붙였다. 처음에는 약간의 진통이 있었지만 서서히 그 규정이 이행됐다.

내가 학과 주임 교수와 교무처장을 하면서 한 이런 조치는 나중에 KAIST가 한국에서 가장 많은 논문을 SCI급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할 수 있는 토양이 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교무처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자 내 스스로 내놨다. 물론 최형섭 원장이 자리를 내놓은 것도 교무처장을 그만둔 큰 이유였다. 그때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는 등 한국의 격변기이기도 했지만 KAIST도 변화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들었다.

조장희 <가천의과학대 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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