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로 무비(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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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공포와 호로가 무섭게 엄습하는 액션 무비」「네오 느와르 무비」.영화나 비디오 선전광고물에서 흔하게 읽을 수 있는 외내어일색의 선전 문구다.공포는 뭐고 「호로」는 또 무엇인지.
독일어 네오(신)에 프랑스어 느와르(흑),여기에 영어 무비까지 합세한 3개국 합성어가 동원됐지만 무슨 말인지 종잡을수 없다.그냥 공포영화나 괴기영화라면 국산영화인줄 알아 지방 흥행사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호로 무비」라고 해야 제값을 받는다는게 요즘 우리 영화판의 현실이다.
자신이 에이즈 환자면서 에이즈 공포를 영화로 만들어 감독·주연까지 맡았던 시릴 콜라르의 프랑스 영화 원제는 「사나운 밤」(La Nuit Fauve)이었다.이 영화가 국내에 수입돼 상영되었을 때는 「사베지 나이트」,프랑스어를 영어로 까지 굳이 번역해 미국영화처럼 만들었다.「방문객」이라는 프랑스 영화가 「더 비지터」라는 제목으로 둔갑하는게 요즘 실태다.
「겟어웨이」에 「터미네이터」까지는 그래도 좋다지만 「투문정션」에 「하우스 오브 스피리트」에 이르면 무슨 말 무슨 뜻인지,왜 영화 제목이 이렇게 붙여져야하는지 도시 이해할 수가 없다. 「사나운 밤」이「사베지 나이트」가 돼야만 흥행이 된다는 고정관념은 영화업자들 스스로가 만든 함정이면서 우리 영화를 비하시키고, 우리말을 오염케 하는 근원이 된다.
언어는 민족문화의 핏줄 같은 것이다.단순한 소리의 표현 도구를 넘어 정신의 기호학이다.컴퓨터라면 미국이 만들어낸 국제 공통의 문명 도구이니만큼 미국식 용어를 쓸 수밖에 없다.그러나 문화적 자존심이 가장 강하다고 할 프랑스와 중국은 이미 독자적용어를 따로 지니고 있다.프랑스어로는 「오르디나퇴르」(정보 정리 기계),중국어로는「디엔나오」(전뇌)다.여기에 프랑스는 최근보호법까지 만들어「불도저」「소프트웨어」까지 추방하려는 신경질적 반응까지 보이고 있다.국제화 시대에 이처럼 민감한 언어보호정책은 시대 역항적 발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는지 모른다.
이에 비해 우리의 언어 현실은 얼마나 참담한가.외래어 오용·남용의 수준을 넘어 홍수를 이루고 있건만 이를 정화하려는 노력이 어디에도 없다.우선 수입영화 제목이나마 우리말로 근사하게 붙여보는 작은 노력을 영화업계 스스로 벌이기를 촉구한다.그게 안되면 외국영화 심의와 수입을 결정할때 영화제목은 우리말로 쓰도록 유도하는 법적 장치를 강구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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