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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땅끝에 선 사람들(19)『그놈 참 실한 놈이었는데.말도 없이 제 할일만 하고 누구한테 폐 끼치는 법이있었나.좋은 놈이 먼저 갔다.』 막장 사고 때 깔려죽은 광택이를 길남은 잠깐 떠올렸다.말도 없고,붙임성도 없던 청년.
『좀 미련한 애였잖아요.』 『아니다.이런 데 와서 날치고 다니는 녀석들이 오히려 미련한 놈들이지.』 명국이 천천히 한숨을내쉬었다.
『그 이야기 듣고 나니…세상이 그런 건가 싶더라.자식도 헌칠하게 잘 난 녀석이 먼저 가기 일쑤니까.친척들 가운데도 저게 뭔 일을 해도 하지 하는 녀석이 꼭 먼저 절딴이 나서 사람들 마음에 못을 박지 않더냐.』 점심 먹고 나서지.다시 일 들어갔다가 한숨 좀 돌리고 하자면서들 앉아서 쉬고 난 때였다.마악들일어서는데 벽에서 푸슬푸슬 흙이 떨어지기 시작했어.명국은 사고가 났을 때를 떠올리며 어금니를 힘주어 물었다.불을 비춰보려고했던 거는 생각이 나.그러는데 갱목이 부러져 내렸던 거지.명국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길남에게 말했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해 줄까.한량은 죽어도 기생집 울타리 밑에서 죽는다더니.내가 말이다,다 죽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 농사나 한번 편안하게 짓고 죽게 해 주십시오 하고 있었다.』 길남이 눈을 껌벅였다.
『아무리 갓이 헐었다 해도 그걸 신고 다닐까.괜찮다.몸 나으면…사람인데,또 뭐 할일이야 얼마든지 있지 않겠냐?』 어느새 마음을 이만큼이나 정리했나 싶어서 길남은 명국의 말에 놀란다.
『여기 누워 있으면서도 네가 걱정이구나.우물가에서 숭늉찾는 사람이라는 게 바로 널 두고 하는 말이거든,아냐?』 『우수 경칩이면 대동강 물 풀린다지 않든.다 때가 와야 되는 거야.생각을 해 봐라.아,열 사람 백 사람이 바위 지고 가서 얼음장 깬다고 해서 대동강 물이 풀릴까.때가 있다는 걸 꼭 명심해라.그리고 말이다.잘난 여자는 보기만 해도 예쁘지.누가 봐도 예쁘고그렇지만 못난 여자는 정이 들어야 예쁜 거야.알겠니? 그런데 이렇게 정들어 예쁜 여자는 누구도 갈라놓지를 못해.사람 사는 이치가,사람 사귀는 이치가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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