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과 젊음이 재산(파라슈트키드의 낮과 밤:1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한국서 밑바닥인생 미국선 우등생으로/단점보다 장점 격려풍토 제2의 삶 개척
고등학교를 중퇴한 신모씨(25·미국미시간대 3년)에게 유학은 제2의 인생을 여는 문이었다.
86년 가정불화로 대구 S고교를 다니다 가출했던 신씨는 무작정 상경,남대문시장 짐꾼·부산 밤무대의 악사·서울∼부산간 화물차 조수등 밥벌이를 위해 「밑바닥」생활을 훑었다.
『그런 생활을 2년쯤 했을 때인가,이런 인생을 살아서 뭘하느냐는 회의가 들더군요.그래서 결심했죠.』 대입 검정고시에 도전,89년 8월 합격한 그가 신문에서 「유학생이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를 본 그 즈음.
『대구의 한 유학원을 찾아갔습니다.TV에서 스탠퍼드대가 좋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그곳으로 보내달라고 졸랐어요.제 학력을 보고 유학원 직원이 지은 황당한 표정을 생각하면….「우선 2년제 대학으로 가는게 어떻겠느냐」며 말을 돌리길래 화가 나서 그냥 나와버렸어요.』
○고중퇴 미시간대 입학
신씨는 곧바로 도서관에서 미국 최상위 20개 대학의 주소를 입수해 모조리 입학원서를 썼다.본격적으로 영어회화공부도 시작했다.
3년동안 나왔던 집을 다시 찾아간 것도 이 무렵이었고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대학측에서 검정고시가 뭔지를 잘 몰라 짧은 영어로 설명하느라 애먹었어요.미국 대학입학시험인 SAT와 토플을 요구하길래 알겠다고 했지만 죽고싶은 심정이더군요.하지만 「막노동으로 밥벌이도 했는데」하고 생각하니 못할 것도 없다는 결심이 섰어요.』 귀국후 신씨는 1년동안 4시간씩 자면서 도서관에서 하루 16시간씩 책과 씨름했다.
그 결과 토플은 대학 졸업생들도 얻기 힘든 6백10점,1천6백점 만점인 SAT에서는 상위권인 1천3백점을 기록했다.신씨는 입학허가를 받은 3개 대학 가운데 미시간대를 택해 92년 가을입학했다.
신씨는 미국학생들도 잘 엄두를 내지 않는 복수전공(경제학·컴퓨터공학)을 하면서 4.3만점에 3.8점대의 평균학점을 유지하고 있다.
「꼴찌에게 갈채를」―.
9월 미국 서부명문대인 UCLA에 3학년 과정으로 편입하게된 오수정양(21·가명).
『저야말로 한국에서의 낙제생이 미국에서 우등생이 된 셈이죠.』 6년간 유학생활에서 다져진 야무진 의지와 철학이 당차다.
서울 S여고 2년때인 88년 여름 어머니 손에 이끌려 샌프란시스코의 외삼촌집으로 떠나올 때만해도 오양은 전형적인 도피성 유학생이었다.
늘 하위권을 맴도는 학교성적으로 대학 진학 가망이 없자 『영어라도 배워 오라』는 부모의 주문에 2년 먼저 도미한 오빠가 다니던 고교에 입학했다.
『한국에서처럼 공부를 못하면 사람 취급도 안해주었다면 벌써 좌절했을거예요.단점보다 장점을 찾아내 다독거려주고 격려해주는 분위기가 내게 힘을 줬어요.』
○온갖 아르바이트 다해
91년 6월 고교를 졸업한 오양은 더이상 열등생이 아니었다.
비록 UCLA에 지원,실패는 했지만 대신 2년제 주니어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전공은 간호학.
본격적인 고생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동부의 명문대생이 된 오빠의 비싼 학비 지원을 위해 집에서의 송금이 2년간 끊겼다.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했어요.시간당 4달러75센트를 받고 패스트 푸드점의 종업원으로 일했고,학교에선 교수들의 채점을 도와주거나 학생들에게 컴퓨터 사용법 안내등 근로학생 일을 했죠.역시 시간당 5달러의 싼 임금이었지만 이 돈으로 모든 생활비를 충당했어요.』 오양은 지난해 토플시험에서 6백점 가까운 점수를 딴데다 고교및 칼리지 재학중 성적이 뛰어나 지난달초 꿈에 그리던 UCLA로부터 편입학 허가 통지를 받았다.
○열등생 과거가 자극제
『열등생이라는 과거를 자극삼아 많은 걸 억제하지 못했더라면,그리고 남들처럼 생활비가 풍족했다면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을거예요.』
취재진은 파라슈트 키드의 유학 현장을 취재하면서 아쉽고 안쓰럽고 화나는 많은 탈선을 목격했다.그러나 신군이나 오양처럼 한국에 있었으면 자칫 일그러진 교육의 틀속에서 희생됐을 많은 젊음이 제자리를 찾고 앞서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보람이었다.〈김석현·이석우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