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6.25 44돌-6.25와 통일 3세대 토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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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먼저 6.25에 대한 직.간접적 경험들을 잠시 얘기해 보죠. ▲李=저는 육군중위때로 그날 예정됐던 약혼식도 치르지 못하고 전방으로 출동,휴전될때까지 3년여동안 전투를 치렀습니다.
전란중에 아버지와 형님이 패주하는 공산당들의 총부리에 희생됐습니다. ▲金=만4세되던 해니까 간간이 기억날 정도지만 피난길에 비행기 폭격에 혼비백산했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당시 지역유지셨던 아버지는 내무서에 구금됐다가 처형직전 탈출해 목숨을 건지시기도 했습니다.
▲秀=포항에서 전쟁을 겪으신 할머니로부터 6.25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피난을 가셨는데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고 식량이 없어 고생했었다고 들었습니다.
-한때 일부 학생운동권등을 중심으로 「북침설」까지 제기됐습니다만 6.25의 발발원인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金=당시 국내외적 갈등상황이 악화된 끝에 전쟁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은 것으로 봅니다.
내부적으로는 민족 스스로의 투쟁결과에 의한 독립이 아니다보니해방후 정치세력부터 여러갈래로 나뉘어 결집된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외부적으로는 승전국끼리의 패권다툼에 희생양이 되어 대리전쟁의 양상을 보였던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 니다.
그러나 1차적 책임은 결국 우리의 내부적 분열에 있었다고 봅니다. 따라서 분단을 해소하는 통일과업의 추진도 우리 스스로가풀어야 할 역사적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秀=결론적으로 이데올로기간의 대립이 빚은 전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이념의 대립이 분단을 초래했고,남북으로 갈라진 정치세력간의 대립.갈등이 극한적인 전쟁으로까지 확대된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봅니다.
▲李=한마디로 북측의 적화야욕과 그에 대한 대비가 너무 없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당시 일선에서 적의 공격징후등을 정찰,보고해도 정치권.군수뇌부 또는 미군당국에서는 그럴리가 있느냐,심지어 당신이 직접 봤느냐는 식으로 안일하게 대처했습니다.
전쟁에 대비함이 없는 평화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준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엄청난 대가를 치른 셈이지요.이런 가운데 기습을 당하다 보니 국민들의 혼란은 극에 달했고,군인들도 부대를 못찾아 갈 정도로 오합지졸이 돼 버렸지 요.
-6.25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일까요.
▲秀=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가 희생양이 됐던 전쟁이었습니다.
우리 민족내부의 분열도 문제지만 주변 강대국들간의 세력확장 전략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른들 얘기를 들어보면 비축식량 한 톨 없이 무작정 피난하라는 것이 당시 우리 정부의 유일한 대책이었던 것 같습니다.전란속에서 국민을 보호할 정부의 기능이 거의 없는 가운데 그나마 미국이 이같은 기능을 대신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합 당한 평가를내려야 하겠지만 우리로서는 크게 반성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金=역사는 반복된다는 얘기가 다시 생각납니다.
4백여년전 임진왜란 직전에도 국론이 분열된 상태에서 일본의 침략야욕에 대한 경계심이 부족했고,이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결과적으로 당했던 양상이 6.25 직전의 상황과 거의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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