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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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나는 등을 돌리고 누워서 잠들어 있는 듯이 대답을 피했지만,그러고 있으면서 생각해보니 애당초 형의 말들은 내 침묵을 요구하는 질문이기도 하였다.센치한 놈은 얼간이가 아니고 센치할줄 모르는 놈은 얼간이고….
형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야,너 눈감고 가만히 있는 거지.그러면 까맣게 보이지.모두가 까매.조금만 더 있다가 잘 보면 가운데 노란 점이 생기지.
그리고 그 점은 점점 커지면서…그래 빨갛게 변해.그 빠알간 게나중에는 다시 까맣게 변하지.…그런게 자꾸만 되 풀이되다가 우린 어느새 잠드는 거야.』 형은 계속해서 지껄였다.내가 잠든 척하고 있는 것이 형을 더욱 기분좋게 만들어준 건지도 몰랐다.
나는 졸렸는데 형은 내 심정 하나를 이해해주지 않았다.
『그 빠알갛게 번졌던 게 바로 열정이라는 거야.모두가 다 타버리면 다시 까맣게 되는 거지.다시 까맣게…까맣게…그럼 이젠 아무 것도 안보이는 거야.그렇지만 뭐 어쩌겠냐구….』형은 잠시말을 끊었다.『…달수야,나 지금 아버지한테 용서해 달라고 그러고 올까…?』 형은 종종 내게「이상해,정말 이상해」그런 생각이들게 만든다.몇년 더 살면 나도 저럴까.
『야,니가 가서 아버지 좀 깨워라.』 나는 아무 말없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썼다.
『그래 우선 자자.밤이니까.깊은 밤이니까.』 형은 말을 그칠것 같았고,곧 실제로 그랬다.조용하고 깊은 밤이었다.나는 속으로 잠깐 생각했었다.스위치를 내려놨던가…정전이 끝나고 우리가 자는데 다시 불이 반짝 들어온다면 귀찮을 일이었다.그렇지만 그때 내가 다시 일어나서 스위치를 확인하고 그러면 형이 무언가 다시 말을 시작할 것만 같았다.일어나는 일도 형이 다시 입을 여는 것도 다 귀찮은 일이었다.어차피 우리는 게으른 형에 게으른 아우였다.
얼마나 지났는지 형이 나를 흔들어 깨웠을 때 방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형은 뻐얼건 얼굴을 하고 침대의 머리쪽에 엉덩이를걸치고 앉아 있었다.작은 후회,스위치를 내려놓을 걸….
『나 아무래도 지금 가서 용서를 받아야겠어.…어때,너두 그게좋지 않겠니.어떠냐구.』 형이 내 의견을 구하고 있는 거였다.
그건 정말이지 웃기는 일이었다.사실 말이지 내게 좋거나 말거나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그 일은…아버지가 아직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일이 무슨 일인지 사실은 나도잘은 알지 못했다.그저 형이 어떤 여자애를 좋아했는데 문제는 그 여자애도 형을 좋아한 거였다.그래서 어쨌든 참지 못한 거였다.뭐가 잘못됐는지 병원에도 가고 그러다가 일이 꼬였고 양쪽 엄마들이 만나 고 그런게 전부였다.
『아니야.넌 몰라.난 불안하다구.난 며칠째 잠도 못잤다구.몇시간씩 빠알갛고 까맣고 그런 것만 계속된다구….』 『글쎄 지금은 다들 잠든 한밤중이잖아 형.내일이라도 기회를 봐서 아버지한테 다 말하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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