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왜 격노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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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 회장은 자신의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기업인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최근 수원에서 열린 선진제품 비교전시 행사장에서 그는 극히 이례적으로 흥분을 감추지 않았고 반도체부문을 강하게 질책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삼성 고위급 인사는 “이 회장은 하이닉스가 채권단 관리상태인데도 삼성전자를 따라잡고 이제는 추월 단계에까지 쫓아온 것을 알고는 자존심이 무척 상한 눈치였다”고 귀띔했다. 이 회장은 특히 하이닉스반도체의 메모리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최진석 부사장이 삼성전자 출신인 점 등을 지적하며 질책의 강도를 더 높였다고 한다.

실제로 ‘반도체의 지존’인 삼성전자가 올 들어 눈에 띄게 비틀거렸다. 연초부터 반도체 값의 하락에 이어 주가 폭락으로 어수선하더니 급기야 사상 초유의 단전사태로 공장 가동이 중단됐다. 7월에는 황창규 반도체총괄 사장이 그간 겸직해 온 메모리사업부장 직을 조수인 부사장에게 넘기는 이례적인 인사조치가 단행됐다. 지난달부터는 그룹 경영진단팀과 삼성전자 감사팀이 합동으로 반도체부문에 대한 강도 높은 경영진단(감사)에 착수하기도 했다.

한때 일본의 자존심이던 소니까지 앞지르며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으로 정상에 오른 삼성전자에서 그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중앙SUNDAY 특별취재팀이 이를 추적했다.

■황사장의 뼈 아픈 실수?

※나노공정: 반도체 회로선폭을 나노미터(nm·10억분의 1m)단위로 미세화하는 공정. 공정이 미세화될수록 단위 면적당 집적도가 높아진다.
60나노공정 D램을 300㎜ 반도체 원판(웨이퍼)으로 양산할 경우 70나노공정 D램보다 생산성을 30% 정도 높일 수 있다. 68, 66, 65나노는 통칭 60나노급으로 불리며, 회로 집적도에서 큰 차이가 없다.
※수율: 제조된 반도체칩 가운데 정상 작동 제품 비율. 수율이 높을수록 생산 단가가 낮아져 반도체 회사의 경쟁력에 혁신적인 지표로 쓰인다. 정상 제품의 비중이 90%를 넘어서면 ‘골든 수율’이라고 한다.
전 세계 D램 업계에서 1, 2위를 달리고 있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현재 생산성 개선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미세화 공정에서 줄곧 앞서가던 삼성이 하이닉스에 발목이 잡히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공정 전환에서 비롯됐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9월 80나노급 D램 양산에 착수하면서 새로운 공정을 도입했다. 반도체 셀의 단위면적을 기존(8F스퀘어)보다 25% 줄여(6F스퀘어) 집적도를 높이는 첨단 기술을 적용한 것이다. 반도체는 같은 칩 면적에 집적도를 높일수록 원가는 떨어지고, 반면 속도는 빨라진다. 신기술이 성공적으로 정착된다면 생산성이 10~15%가량 향상된다는 게 삼성 측의 계산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신 공정을 채택한 뒤 수율이 제때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이 공정을 전환해 생산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장에서는 물량이 달리는 바람에 ‘없어서 못 파는 호황’이 왔다”고 했다. 이러는 사이에 하이닉스와 일본의 엘피다 등 후발업체들은 출하량을 늘리며 톡톡히 재미를 봤다. 하이닉스는 지난해 창사 이래 최대의 매출을 올렸다. 올 1분기에는 99년 이후 처음으로 D램 출하량에서 삼성을 앞지르기도 했다.

삼성전자의 수율은 점차 안정됐다. 1분기에 뚝 떨어졌던 D램 시장점유율도 2분기 들어서는 회복세를 탔다. D램 가격이 맥을 못 추는 상황에서 삼성이 다른 업체보다 나은 실적을 올린 것도 기술 혁신의 덕이 크다. 하지만 삼성 입장에선 호황 국면에서 큰 돈을 벌지 못했다. 경영진에 더 뼈아픈 점은 삼성이 주춤거리는 사이 경쟁업체들이 차세대 D램 개발 부문을 거의 다 따라잡았다는 것이다. 올 3월 삼성전자가 68나노 1기가비트 D램 제품의 양산을 시작하자 하이닉스도 6월에 비슷한 수준인 66나노 양산으로 응수했다. 지난달에는 일본의 엘피다까지 연내 65나노 수준으로 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분초를 다투며 개발 경쟁을 벌이는 반도체 시장에서 한번의 실수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온다. 이 때문에 신기술 도입 당시부터 삼성전자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삼성 출신의 한 인사는 “엔지니어끼리 신기술의 생산성을 놓고 갑론을박을 했었다”고 말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 “기술에서 앞서려다 비즈니스에서 실패한 사례”라며 “근래 삼성이 ‘시장과 엇박자’를 보이는 경우가 잦다”고 했다.

■이 회장은 왜 격노했나

이 회장은 반도체와 관련해서는 전문가 수준이다. 그의 경영인으로서 첫 사업이 바로 반도체다. 74년 개인 자금으로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뒤 천문학적인 적자를 보면서도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이런 의지는 삼성이 세계 메모리반도체 업계 1위 자리에 오른 뒤 정상을 지켜나가는 원동력이다. 이 회장은 반도체 산업이 시황 변동에 따라 부침이 심한 산업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따라서 그의 강한 질책과 이례적인 인사, 강도 높은 감사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을 보면 반도체부문에 본질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라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이 회장의 그간 경영스타일로 볼 때 일시적인 실적 부진을 탓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삼성은 90년대 이후 ‘기술 선도’로 세계 메모리반도체 업계를 평정했다. 앞선 기술을 바탕으로 초기 시장을 선점, 막대한 프리미엄을 챙겼다. 이어 후발업체들이 시장에 진입할 즈음에는 대량 생산으로 값을 떨어뜨리는 전략을 썼다. 그리고 다시 생산성을 높인 제품으로 빠져나갔다. 이런 선순환이 삼성 반도체의 ‘성공 방정식’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런 방정식이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무엇보다 ‘기술 선도’라는 전제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삼성의 ‘반도체 카리스마’에 숨을 죽이던 후발업체들은 잇따라 도전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지난해까지 이어진 반도체 업계의 ‘3년 호황’ 덕에 이들은 실탄(자금력)도 넉넉하다. 후발 경쟁업체들은 또 삼성에 맞서기 위해 서로 합종연횡하고 있다. 일본의 엘피다는 대만 파워칩과 D램 합작법인을 세웠고, 하이닉스도 대만의 프로모스와 힘을 합쳤다. 이들은 D램 가격이 원가 수준을 맴도는 상황에서도 투자 경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삼성이 절대우위(시장 점유율 46%)에 있는 낸드플래시도 유사한 조짐이 있다. 일본의 도시바는 미국의 샌디스크와 함께 이달 초 대규모 낸드플래시 공장을 추가로 세웠다. 도시바의 경영자들은 이 자리에서 “삼성을 넘어서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경쟁 업체들이 기술과 자금에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삼성을 포위해가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올 들어서는 삼성의 시장 예측도 계속 어긋났다. 황 사장은 지난해 말 “D램과 낸드플래시 모두 2007년과 2008년에도 계속 좋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연초부터 낸드플래시에 이어 D램 가격이 급락하자 말을 바꿔 “2분기부터는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2분기에도 부진하자 다시 “하반기에 개선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잠깐 회복되는 듯했던 반도체 가격은 이달 들어 다시 추락해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반도체 수요가 다변화되면서 경기를 진단하기가 쉽지 않다”며 “달라진 환경에 맞게 시장 예측력과 전망을 정교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전쟁의 승자는

그렇다고 삼성이 반도체의 정상 자리를 쉽사리 내주진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삼성은 인력과 자금, 기술 등 모든 면에서 여전히 세계 최고다. 시장점유율에서도 일정 수준의 격차를 유지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바닷물이 빠지면 누가 발가벗고 헤엄치고 있는지 알 수 있듯 시황이 어려울수록 강자가 누구인지 드러날 것”이라며 향후 경쟁에서 결국은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삼성도 변화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업계의 한 인사는 “삼성전자 관계자가 서너 번씩 찾아와 ‘우리의 문제가 뭔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달라’는 요청을 할 정도”라며 “예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12월 1일자로 취임 20주년을 맞는다. 삼성그룹은 해마다 1, 2월에 하던 사장단 인사를 12월 이전에 마무리해 조직을 일신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이 굳이 경쟁업체인 하이닉스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면서 조직 내 위기감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킨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특별취재팀=나현철·조민근·이상재 기자 tigera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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