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人을 찾는 화가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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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02면

미술동네에서 만난 화가 가운데 가장 유쾌한 분은 주재환(67)씨였습니다. 그는 평생 화가였지만 나이 육십이 되도록 그 흔한 개인전 한 번 열지 않았는데(결국 그를 흠모하는 후배 몇이 등을 떠밀어 나중에 개인전 ‘이 유쾌한씨를 보라’를 열긴 했지만), 그 이유라 짐작되는 뼈있는 얘기를 하시더군요.

순화동 편지

“화가들 이력에 개인전 수십 회에 단체전 수백 회 출품이라고 써 넣은 거 보면 있지, 꼭 총 비행 출격시간 기록 같아.”

오랜만에 안부 전화라도 넣을라치면 돌아오는 답에 해학이 넘칩니다. “내가 지금 장로야 장로. 장시간 노는 사람. 시간이 많으니까 종일 그림 그리고 살아.”

모처럼 맘먹고 그림 생각을 여쭸을 때 주 선생이 들려주신 말씀을 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실은 후회가 많은 거 같아. 말 못할 게 쌓이잖아. 그걸 유화로 푸는 거야.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지, 하면서 붓질 한번으로 탁 찍어내고, 또 한번 찍어가며 하나씩 반추하고. 그러다 보면 썩은 물을 채로 받쳐 맑은 물 걸러내는 것 같아. 지지고 볶는 삶, 그 복판에서 살고, 그리고, 그러다 가고 싶어.”

또 한 분, 잊을 수 없는 화가가 손장섭(66)씨입니다.
주 선생이 익살로 무장한 발랄파라면, 손 선생은 진중하게 엄숙한 무게파라 할 수 있죠. 삐딱하게 뒷짐을 지고 어슬렁어슬렁 느리게 걷는 선생의 모습은 삶의 풍경이자 태도 같았습니다. 그런 되새김질 속에 태어나는 그림은 현실에 대한 발언으로 가슴을 쳤지요. 한국의 자연 속에 역사를 스며들게 한 그의 그림이 그대로 한 폭의 한반도사가 되는 까닭입니다.

이 두 미술계 어른이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려 뭉쳤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름 하여 ‘아름다운 의인재단’이라네요.
10월 5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창덕궁 앞 갤러리 눈(02-744-7277)에서 2인전을 열어 그 수익금의 일정 부분을 기증해 재단을 만든다는 것인데요. 이 기금은 앞으로 크게 두 가지 일에 쓰일 예정이라고 합니다.

우선 신진 작가들을 후원하는 작업실을 만드는 일. 다음으로는 우리 주변에서 의롭고 용감한 행동으로 본받을 만한 보통 사람을 주제로 예술가들이 만들 공원 설립에 주춧돌을 놓는다는 겁니다.

두 번째 대목이 재미있습니다. 위대한 위인인 의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인 의인이어야 한다는 조항 말입니다.
큰 목소리로 대의를 부르짖는 흔해 빠진 위인은 일절 제외시킨다나요.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다 숨진 사람, 지하철 철로에 떨어진 이를 구한 사람 등 우리 주변에서 우리와 함께 사는 의인을 소재로 공원을 만든다는 구상이 신선합니다.

묵직한 손 선생과 톡톡 튀는 주 선생이 만나 결의했음직한 ‘의인 재단’입니다.
너도나도 돈 좇아 미친 듯 춤을 추고 있는 한국 미술시장에서 두 화가의 ‘의인 재단’이 진정한 ‘의인’으로 제 구실을 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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