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셋, 청년화가 전혁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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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05면

전혁림은?
1915년 경남 통영군에서 태어나 통영수산학교를 다니며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학창시절에 그림 솜씨를 인정받아 미술학교 유학을 꿈꿨으나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진남금융조합에 취직한 뒤 홀로 수채화와 유화 그리기를 지속했다. 48년 극작가 유치진, 시인 유치환·김춘수, 시조시인 김상옥, 작곡가 윤이상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창립해 통영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을 꾀했다. 49년 제1회 국전(國展) 서양화부에 ‘정물’이 입선하며 경남 지역의 신진 양화가로 주목받는다. 60년대에는 부산 대한도자기회사 공방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며 나름의 화풍을 세웠다.
화가 전혁림이 서울 화단에 본격 소개된 것은 그가 회갑을 맞은 1975년이었다. 뒤늦게 그의 작품이 평가되면서 작가 나이 일흔다섯이던 89년에는 호암갤러리에서 중앙일보사 주최로 ‘전혁림 근작전’이 열렸다. 2002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올해의 작가’로 뽑혔다. 2003년 통영시 봉평동에 자신의 개인미술관인 ‘전혁림 미술관’을 세우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올해 파블로 피카소(1881~1973)와 동갑이 됐다. 스페인이 낳은 20세기 서양미술계의 거장 화가가 별세하던 그 나이다. 아흔셋에도 지치지 않고 종일 그림을 그리는 그는 괴물이라면 괴물이다. 2005년 연 개인전 제목이 ‘구십, 아직은 젊다’였으니 더 말해 무엇 하리.
“난 24시간 그림을 그린다오. 꿈속에서도 그리고 있으니 거짓말은 아니지. 어제는 좋은 꿈을 꿨다오. 피카소가 나타나 내 손을 이끌며 스케치하러 가자는 거야. 걸작이 나올 것 같아요. 참 좋은 거 이제 나옵니다.”

신작전 여는 정열의 화가
아흔셋은 생물학적 숫자일 뿐일까. 노화가는 손끝 하나 떨지 않고 당당하게 붓을 부린다. 붓질 한 번에 ‘흠’ 하는 기(氣 )서린 짧은 호흡이 따라붙는다. 그 나이에도 안경 없이 신문을 읽는다니 놀라울 뿐이다.
작업실 바닥은 피 튀기는 전쟁터 같다. 물감이 덕지덕지 눌어붙어 본래 색을 알 길 없는 앉은뱅이 의자와 실내화가 이 싸움의 증거처럼 작업실 구석을 지킨다. 화가는 바로 붙어 있는 침실과 작업실을 온몸으로 밀고 다니며 촌음을 아껴 그림에 매달리고 있다. 전시회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10월 11일부터 서울 팔판동 갤러리 아이캠(ICAM)에서 개최하는 ‘아흔셋, 전혁림 새(新) 그림전’(25일까지, 02-736-6611)은 아마도 현역 작가로는 최고령에 여는 개인전으로 기록될 듯하다.
지난해 8월부터 11월 초까지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연 특별전이 끝나고 불과 1년도 안 돼 또 신작전을 여는 것이다. 1970년대 한때 몰두했던 여성 누드를 다시 그리는 노화가의 눈이 생명의 힘으로 반짝인다.

“그때는 돈이 없어서 제대로 된 모델을 구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집창촌도 찾아가고 술집 나가는 언니들한테 부탁도 했어요. 사람들은 누드가 왜 그렇게 뚱뚱하냐고들 하지만 난 사실에 충실한 누드를 그렸어.”
다시 살아나는 누드는 한창 젊은 시절, 화가가 몸피 푸짐하게 그리던 그 누드와는 다르다. 아흔셋 화가가 그리는 여인의 벗은 몸 안에는 삶과 죽음이 함께 있다. 반은 죽어 있고 반은 살아 있다. 그는 삶 저편을 보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그 둘의 경계를 지우고 하나로 껴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옆에서 작가의 큰아들이자 역시 화가인 전영근(50)씨가 빙긋 웃으며 말한다. “여기, 아버지가 예전에 좋아하시던 그 모델 모습 나왔네.”

예술은 교육이 필요 없다
전혁림씨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연방 손을 움직였다. 풀리지 않는 새 그림의 구도를 손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문학을 하고 싶었어요. 내가 창립회원으로 참가했던 통영문화협회를 보면 알지만 벗 삼았던 이가 문인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조형예술로 돌아섰지요. 타고난 재주는 좀 있었던 모양이오. 수산학교 다닐 때도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미술을 하려면 외국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당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어쩌겠소. 독학으로 하자고 마음먹었지. 그래서 내가 지금은 ‘예술은 교육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거요. 내가 그 증거거든. 미술은 배워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내 신념이오.”
그는 “회화는 이야기에서 발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얍삽하게 물감만 발라서 내놓는 그림을 보면 불쾌하다”고 했다. 요즘 잘 팔리는 그림들 중에 아마추어보다 못한 것들이 많다며 “좋지 못해요”라는 표현을 썼다.

더 강렬해진 色과 線
화가의 손은 몹시 연하고 순하고 부드러웠다. 물감이 퍼렇게 든 그 손은 통영의 앞바다 색처럼 보였다. 쪽빛 바다색을 뭉텅 건져다 화폭에 쏟아부은 듯 더 푸르게 휘날리는 화폭 속에 한민족의 온갖 형상이 들어앉아 있다.
“우리나라 예술이 참 곱고 고급스러운 겁니다. 생활 속 미감은 또 어떻습니까. 한복 하나를 봐도 그래요. 난 내 그림 속에 바로 그 한복의 색과 선을 담고 있어요. 우리 삶과 생활을 그리는 거지요.”

그는 통영을 두르고 있는 미륵산이 자신을 살렸다고 했다. 미륵산이 떡 버티고 있지 않았으면 어디로 튀어나갔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통영 바다와 미륵산을 작품의 원천으로 삼는 까닭이다.
젊은 시절의 예술동지였던 시인 김춘수는 ‘전혁림 편모’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화가 전혁림의 집 언저리의 자연환경은 너무도 밝고 화려했다. 하늘은 쾌청이라 더없이 푸르고, 저 건너 내다뵈는 바다 또한 짙은 쪽빛이다. 빛깔은 화가의 사상이란 말이 있지만 그에게는 한때 청색시대가 있었다. 그 무렵 그의 화폭을 진하게 물들인 그 청색은 내가 본 통영의 그 하늘빛이요, 특히 그 물빛이다. 화가로서의 그의 뇌리에는 늘 통영 앞바다의 물빛이 그득 괴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시인을 감동시킨 그 푸른색은 이제 더 진하고 더 투명해졌다.
미륵산의 당당한 기상을 이어 내린 선은 더 강직하고 투철해졌다. 한반도의 지평을 넘어 세계 온갖 문명의 문양이 꿈틀거리며 전혁림의 화폭 안으로 모여든다. 그가 꼭 ‘애굽’이라 부르는 이집트로부터 저 멀리 아프리카의 원시미술까지, 세상 모든 색과 선과 형태가 그의 손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다. 화가는 “세상 모든 그림을 내가 다 잡아먹었다고 나는 자부하고 있소”라고 말했다.

“내 그림을 잘 보시오. 거기 불화(佛畵)도 있고 성화(聖畵)도 있고 입체파 그림도 있고 초현실주의 그림도 있소. 굉장한 겁니다.”

지치지 않는 그림 욕심
전혁림씨는 요즈음 그림에 써넣던 서명을 바꿨다. 한자 이름의 가운데 글자인 혁(爀)자와 함께 쓰던 영어 ‘CHUN’을 ‘JEON’으로 바꾼 것이다. 미술시장에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 자신의 위작 탓이다. 보는 족족 거둬들여 없애고 있지만 여전히 전혁림의 가짜 그림은 또 나온다. 예부터 이름난 화가일수록 위작이 많았던 탓을 해야 할까.
“화면 하나에 너무 많은 것을 집어넣으려고 욕심을 부리는 나를 볼 때면 비워야지, 하다가도 또 캔버스에 달려들게 되네요. 화가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겠지만 내 마지막 하고 싶은 일은 그림 그리는 일이라오. 붓을 들고 캔버스에 쓰러져 숨을 거두는 것이 내 소원이지.”
아흔셋이지만 여전히 청년 화가인 전혁림은 쓰고 있던 모자를 살짝 들어올려 백발을 내보이며 말했다. “며칠 전 파마를 했는데 잘 안 나왔지 뭐요. 다시 해야 할까봐.”

아름다운 동반자
전혁림씨 후원하는 김이환 이영미술관 관장

전혁림씨가 아흔셋의 나이에도 이렇듯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는 뒤에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 김이환(73)·신영숙 이영미술관 관장 부부다. 작품이 좋아서 무작정 개인전을 열고 있던 전씨를 찾아간 김 관장 부부는 작가의 정직함에 반해 스스로 나서 후견인이 됐다.

김 관장 부부는 매주 일요일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통영 전혁림미술관으로 내려간다. 이 ‘통영 가는 길’이 어느덧 3년 반이 됐다.
집안일로 두어 번 못 내려갔을 때 전씨가 얼마나 섭섭해하던지, 그 뒤로는 차마 가지 못한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김 관장의 이야기다. 두 사람이 찾아오면 1주일 내 그림 그리느라 작업실에 묶여 있던 전씨는 모처럼 밖으로 나가 바람도 쐬고 그림 이야기도 나누며 일종의 휴식을 즐긴다. 다음 주에 작품 할 에너지를 얻는 셈이다. 전통 목기에 작품을 하게 된 것이 김 관장 부부의 아이디어였으니 후원자의 역할을 넘어선 관계라고 볼 수도 있다.
김 관장 부부에게도 주말 통영 나들이가 큰 기쁨이 되고 있다. 아흔셋 노인이 온몸으로 작품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면 그 열정에 감염된 듯 기운이 난다는 것이다. 김이환 관장은 “‘내 나이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다짐하게 된다”고 했다.

김이환 관장 부부는 이미 한 명의 걸출한 화가를 후원한 이력이 있다. 채색화의 대가인 내고(乃古) 박생광(1904~85)이 그다. 박생광을 후원할 때도 작가가 살던 서울 수유리 집을 일요일마다 꼬박꼬박 찾아다녔다. 박생광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물감은 외국에서라도 구해왔고, 그림을 위해 해외여행이 필요하다 원하면 동반해서 다녀왔다. 경주 남산에 갔을 때는 나이 든 화가를 김 관장이 업고 산을 올랐을 정도였다.
한국화단이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박생광의 그림세계를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보고 작품을 수집한 김 관장은 결국 그 그림들을 위해 이영미술관을 열게 됐다. 박생광이 진주농업학교의 선배이기는 했지만 그 끈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깊은 인연이었던 것이다. 이 연으로 김이환 관장은 나중에 일본으로 유학까지 떠나게 된다. 그가 2004년에 펴낸 『수유리 가는 길-민족혼의 화가, 박생광 이야기』는 한 화가와 후원자가 만나 일군 아름다운 인연을 기록한 책으로 한국 미술사에서 희귀한 자료로 꼽힌다.
김이환 관장은 “이승에서 10년간 그랬듯이 이제는 저승에서 오늘에 이르도록 내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박생광 선생, 이어진 전혁림 선생과의 만남이 결국 내 인생의 빛”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생광·전혁림을 이어 사진가 김아타를 후원하는 일이 이영미술관의 다음 과제”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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