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低質문화 러시아 출판계 쓰레기場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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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오늘의 러시아 문화 현실을『표현의 자유가 외설의 자유와 혼동되고 있다』며 개탄한 사람은 바로 솔제니친이다.
20년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최근 귀국한 솔제니친의 눈에 비친 러시아는 서방에서 마구 유입된 저질문화의 쓰레기더미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인지도 모른다.그중에서 가장 흉한 꼴을보이고 있는 분야가 출판이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저질 에로물.섹스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미국의 상업작가들이 쓴 황당무계한 흥미물.폭력물이 출판시장을교란하고 있다.
『러시아 북 리뷰』의 주간 베스트셀러 리스트는 서구에 경도된이같은 러시아 출판계현상을 대변한다.
모스크바 시내 15개 주요서점과 50개 가판대를 대상으로 집계한 최신 베스트셀러(5월31일자)10위권내에 든 소설 가운데6권이 번역물이다.앤 에드워즈가 쓴『스칼렛』을 비롯,『아름다운호박석의 종말』(카타리나 훅스著),TV시리즈로 방영됐던『야생 장미』등이 그것이다.러시아 작가 예브게니 예프투셴코가 쓴『죽음앞에서 죽지 말라』가 1위를 기록하고 있으나 고르바초프의 실권계기가 됐던 91년8월의 쿠데타를 소재로 한 스릴러물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비소설 부문도 마찬가지여서 흥미위주의 가벼운 읽을거리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점성술,A에서 Z까지』 『제정러시아 爵位章 도해집』『크렘린의 부인들』이 그런 책들이다.이와 함께 『비즈니스 윤리와 에티켓』 『對서방 창업가이드』 『독일기 업 가이드,A에서 Z까지』따위의 경영관련서적도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러시아 정신을 대표하는 도스토예프스키나 솔제니친을 버리고 스티븐 킹이나 마이클 클라이튼으로 달려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토론과 자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그동안 자행됐던 정신적 억압에 대한 일시적 반작용이라는 분석에서 공산독재에 기인 한 러시아 정신의 근본적 타락이라는 진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강제추방 이후 미국에 살며 서방문화를 현장에서 체험한 솔제니친 같은 이는 서구 대중문화의 본질적 사악성에서 현상의 원인을 찾기도 한다.
「붉은 제국」붕괴 이후 서구 저질문화의 쓰레기장으로 전락하고있는 러시아 문화 현실에 대한 지식인들의 자성이 출판계에서는 소그룹출판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정보가 차단되고 사상이 통제되던 시기,러시아인들은 솔제니친의『수용소 군도』를 숨어 읽으며 자유를 꿈꾸었다.그러나 막상 자유가 왔고 돈이 자유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지금 그들이 찾는 것은 위대한 문학도,진지한 문학도 아니다.골치 아 픈 책을 읽으며 한가하게 보낼 시간이 없는 것이다.
미국 일간지 뉴욕 타임스紙 6월5일자에 실린 인터뷰에서 한 러시아 지식인이 지적했듯 그들에게 있어 전체주의 시대는 강요된사치의 시기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裵明福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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