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에세이] ‘김정일 와인’에 대한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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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브스코리아

와인은 문화예술적이라고 하고, 사랑의 하모니를 빚어낸다고도 한다. 때로는 화해와 협력의 상징으로 정치적 의미를 담을 때도 있다. 7년 전 평양에서 있었던 돌발 ‘와인 이벤트’는 북한 지도자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꿔 놓기도 했다. 다시 남북 정상이 만나는 자리에선 카메라에 무슨 와인이 잡힐까 궁금해 하며 그때 그 에피소드를 더듬어 봤다.

2000년 6월 16일 금요일 12시30분 평양 대성구역에 있는 영빈관 ‘백화원초대소’ 연회장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남북 합의를 축하하고 우리 대표단을 환송하는 오찬을 마련했다. 귀한 음식과 산삼술도 나왔던 극진한 차림의 자리였는데 김 위원장 자리에 리델 그랑크뤼 와인 잔이 놓여 있었다.

북한 연회 서비스 부서인 봉사총국의 직원이 앞에서 왼손으로 와인을 조금 따랐다. 위원장은 흘깃 와인 색깔도 보고, 살짝 흔들어 향을 맡고, 한 모금 맛본 후 고개를 끄덕이며 서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 위원장은 와인 잔이 익숙한 듯 잔의 아랫부분을 잡고 건배를 제의했는데 우리 측 인사들은 어색한 자세로 잔 윗부분을 잡거나 아예 손바닥으로 잔 위를 감싸서 들어 보이기도 했다. 모두 당시 방송 뉴스를 본 그대로다.

그 시절 와인의 마력에 끌려가던 때였기에 어떤 와인인가에 관심이 컸다. 하지만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마감 뉴스 방송 녹화분을 풀어가며 찾아보기로 했다. 방송에 잠시 스쳐 지나간 병의 모양새가 보르도 타입이었고, 라벨 자리에 첨성대 비슷한 그림이 흔들려 있었다.

다른 정보도 있었다. 북한이 그해 봄 60여 상자의 프랑스 특급 와인을 조총련 측을 통해 구매하며 일본 와인업계에 화제로 떠올랐었다는 이야기였다. 적어도 보르도 특급 와인이라야 마실 것이란 추측에 따라 샤토 라투르(Ch. Latour)일 것이라고 결론내리고 당시 좋은 빈티지인 94 · 95 · 96년 중 하나라고 추정했다.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므로 와인 동호회 게시판에만 글을 실었는데, 모 일간지가 문화 면에 ‘남북 정상 와인은 샤토 라투르’일 것이라고 인용했다.

그 뉴스는 화제가 되며 비싼 값에도 국내 재고는 삽시간에 동이 났다. 모 와인숍은 일본에서 긴급 공수해 와 세트 판매로 고수익을 올렸다. 그해 가을 샤토 라투르 사장이 서울에서 처음 시음회를 열었을 때 그는 “김정일 이야기를 들었다”며 “라투르라면 정상급 와인이니, 남북 정상회담 와인으로서도 제격이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샤토 라투르는 해마다 포도품종 비율이 조금씩 변하지만 대개 카베르네 소비뇽 70%, 메를로 20%, 카베르네 프랑 10%로 배합된다. 짙은 자주색에 계피와 감초향, 그리고 미네랄 느낌이 베어나는 풀바디 와인으로 잔향(finish)도 40초 이상이다. 흔히 ‘백마를 탄 영주’에 비유되기도 한다.

좋은 자리가 생겨 라투르 95년산을 열어 3시간가량 디캔팅한 다음 슬금슬금 입에 머금고 옛 기억을 재생했다. 10년 이상을 병에서 숙성된 것이라 입에 닿을 때는 첫 느낌이 무척 부드럽다. 하지만 맛은 입안을 가득 채우듯 풍부했고 타닌은 비단결 같다.

이래서 ‘라투르, 라투르 하는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해마다 새 빈티지가 출시되면 제일 먼저 매진되는 보르도 특급 와인의 명성에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함께 자리했던 한 입문생은 “이래서 몽환적이란 표현이 나오는군요”라며 “시집갈 자금으로 좋은 와인이나 마실까 보다”라며 활짝 웃었다.

글 우서환 비나모르 사장·일러스트 조경보
(vinamour@vinamou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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