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양반아닌 일반백성이 억울함 호소하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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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조선시대 선비들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대표적 방식은 상소(上訴)였다. 상소란 아랫사람의 실정이나 마음을 윗사람에게 전한다는 의미다. 상소의 내용은 국가 정책에 대한 건의, 인물에 대한 평가, 왕의 정치에 대한 질타 등 다양했다.

 상소문은 우선 승정원(비서실)을 거쳐야 했다. 승정원에서는 각종 상소문을 접수하고, 왕에게 보고할 만한 내용인지를 검토한다. 왕에게 보고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상소를 올린 사람에게 반환했다.

 상소문을 읽은 후 왕이 그에 대한 조치를 상소문 뒤에 적어 다시 승정원에 내려주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이후 승정원은 관련 부서에 해당 조치를 취하도록 했고, 상소문은 당사자에게 되돌려주었다.

 ‘봉장’이라 하여 비밀 상소문도 있었다. 승정원에서 내용을 보지 못하도록 밀봉한 것을 말한다. 왕에게 직접 올라간 봉장을 보고 왕이 격노해 풍파가 생기는 경우도 많았다.
 원론적으로 양반·중인·양인·노비 등이 모두 왕에게 상소할 수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양반들의 의사소통 창구였다. 일반 백성들이 상소하기란 어려웠다. 무엇보다 한문으로 문장을 쓰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억울한 사정을 푸는 방식은 소원(訴寃) 제도였다. 우선 지방 관찰사나 한양의 형조에 소원을 하고, 그래도 억울함이 풀리지 않으면 사헌부에 소원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안풀렸다면 신문고를 치도록 했다.

 일반 백성들의 소원 제도가 복잡했기 때문에, 왕의 행차 시 직접 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꽹과리 치기)이라는 제도가 생겼다. 격쟁마저도 어려울 경우 괘서(掛書)라 하여 대궐·성·관청의 문에 글을 써 붙이는 관행이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대자보다. 한글 괘서도 적지 않았다. 연산군 때의 한글 괘서 사건은 유명하다. 연산군과 장녹수의 추문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한글이 불온문자로 낙인찍히고 사용이 금지되기도 했다.

신명호(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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