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魂 실린 노래로 恨 날려 버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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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대에 지원하는 것조차 거절당하던 제가 한국.일본 정부의 도움을 받아 20주년 콘서트를 열다니…"

재일동포 2세 소프라노 가수 전월선(田月仙.45.사진)씨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많은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듯했다.

그는 다음달 28일 도쿄(東京)에서 데뷔 20주년 기념 콘서트(주일 한국대사관 주최.일본 외무성 등 후원)를 연다. 지난 16일 저녁 도쿄 신주쿠(新宿)구에 있는 그의 연습실을 찾았다.

전씨는 노래를 통해 한국.북한.일본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해온 대표적인 한국인이다. 1985년 평양 공연에 이어 94년 서울에서 수도 6백주년 기념 오페라 '카르멘'의 주연을 맡음으로써 남북한 무대를 차례로 밟은 최초의 성악가가 됐다. 그 자신도 "두 공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는 98년 서울시.도쿄도의 자매결연 10주년 기념 서울 오페라 공연에 참여했고, 2002년 한.일 공동월드컵 때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총리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초청한 만찬석상에서 '아리랑''후루사토(故鄕)' 등을 불렀다.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꿈조차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일제 시대에 아버지.어머니가 경상도 진주에서 왔어요. 아버지는 학도병으로 끌려왔지요. 민족학교(조총련계 학교)를 졸업했는데, 일본 내 대부분 대학이 응시자격을 주지 않더군요. 다행히 도호(桐朋)음대가 응시를 허락해 합격했지요."

도호 음대는 세계적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小澤征爾)가 졸업한 학교. 田씨는 대학졸업 후 83년 일본 최대 규모 오페라단인 '니키카이'(二期會)에 들어갔고, 잇따라 독주회를 열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점차 유명해지면서 미국.유럽.중국 등에서 '춘희''나비부인''피가로의 결혼' 등 유명 오페라의 주연을 맡게 됐다. 지난해엔 동유럽 공연에 나서 소피아 필아모닉 등과 협연했다. 그는 "매년 30회 이상 무대에 서고, 1백회 이상 연주회를 연다"고 말했다.

"대학에선 제가 유일한 재일동포여서 항상 고독했어요. 집단따돌림까지는 없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을 느낄 때가 많았지요."

전씨는 93년에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현재 일본 성악계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는 한국인은 전씨뿐이다. 자신의 성공 비결에 대해 그는 "일본 사람들이 취약한 연기.무용을 열심히 익혔고, 언제나 혼이 밴 노래로 관객을 빨아들이려 노력했다"고 털어놓았다.

"어머니가 나를 낳을 때 호수에 핀 수선화에 보름달 빛이 비치는 태몽을 꾼 뒤 '월선'이란 이름을 붙여줬어요. 지금까지 내 이름을 지켜온 게 자랑스러워요." 그는 "여러 프로덕션이 '일본 이름으로 활동한다'는 조건으로 스카우트 하겠다고 나섰지만 모두 거절했다. 나를 속여 성공하기는 싫었다"고 말했다.

전씨는 공연 레퍼토리마다 우리 가곡을 꼭 넣는다. 2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는 '영원한 사람을'이란 주제 아래 '고려 산천 내사랑''고향의 노래''한 오백년''사쿠라' 등 한.일 가곡과 '춘향전''나비부인' 등 오페라의 명장면을 부를 예정이다.

"출발점은 조국에 대한 사랑이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한.일 양국의 우정, 그리고 인류 보편적인 사랑도 내 목소리로 표현하고 싶어요."

도쿄=오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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