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큰 GS그룹의 허창수 회장은 얼마 전 50여 명의 계열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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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A:일류기업 전략 따라 하는 거예요 정상에 오른 한국 기업 많아지자 이제는 쫓아갈 곳 없어 고민해요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큰 GS그룹의 허창수 회장은 얼마 전 50여 명의 계열사 최고경영진과 함께 외국의 유명 기업 경영 전문가를 초청해 특강을 들었습니다. 초대된 강사는 미국계 컨설팅 회사인 모니터 그룹의 헤르베르트 베르너 박사입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독일 중심의 전자회사에 불과했던 '보쉬 앤드 지멘스'가 어떻게 세계 최대의 전기전자 그룹으로 급성장했는지, 그 성공 비결은 뭔지를 들어 보려는 게 특강의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1987~2000년 이 업체의 최고경영자(CEO)로 일하면서 회사를 초일류 글로벌 기업으로 탈바꿈시킨 주역의 한 명입니다. GS그룹은 요즘 해외 석유개발 및 건설 수주 등에 적극 나서고 있어요. 그런 GS에 보쉬 앤드 지멘스는 글로벌 진출 전략을 짜는 데 참고하기 안성맞춤인 '성공 모델'인 셈이죠.

이처럼 훌륭한 경영 기법과 전략.시스템으로 뛰어난 경영 성과를 거두는 회사를 눈여겨 보고 그들의 장점을 취하려는 업체들이 근래 부쩍 많아졌습니다. 생산성이나 1인당 매출 면에서 앞선 경쟁업체의 경영 실적을 목표로 정하는 일도 흔합니다. 이 모두가 국내외 시장에서 기업 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자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발걸음입니다. 미국 경영학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이런 움직임에 '벤치마킹 전략'이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틴틴 여러분들도 성적이 뛰어난 친구들이 어떻게 공부하는지 비결을 묻거나, 역사상 위인들의 훌륭한 점을 본받으려는 노력을 하지요? 멀리 갈 것 없이 이런 것들이 넓은 의미의 벤치마킹이지요. 벤치마킹은 자동차의 길을 찾아 주는 내비게이션처럼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줍니다.

◆선두기업 따라 하기=사실 벤치마킹은 우리나라 기업들이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세계 시장에서 우뚝 서는 데 큰 힘이 되어 준 경영기법의 하나입니다. 생겨난 지 100년 넘는 기업이 수두룩한 미국이나 유럽.일본 같은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 기업의 본격적인 역사는 20, 30년 정도입니다. 두산그룹의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고 하지만 길다고 하는 기업들도 반세기 정도를 넘긴 게 고작이에요. 그러니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게 모방이었지요. 상당수 업체는 글로벌 선진 기업의 경영 기법과 기업 운영 시스템을 본뜨거나 흉내 내는 전략으로 잽싸게 선진 기업들을 따라잡았지요. 우리나라 최대 그룹인 삼성도 예외가 아닙니다. 삼성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의 세계 최대 기업인 제너럴 일렉트릭(GE)의 크로톤빌 연수원에 똑똑한 임원들을 보내 인재 양성 전략 같은 첨단 경영 기법들을 전수받았어요. 삼성은 왜 허다한 일류기업 중에 GE를 벤치마킹 대상으로 택했을까요. 바로 GE와 이 회사 경영진은 '살아 있는 경영 교과서'로 불릴 만큼 최고의 벤치마킹 모델로 명성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1879년 세운 GE는 원래 발전 설비와 항공기 엔진을 만드는 제조업체로 출발했지만 이후 의료나 서비스.금융 등 생소한 사업 부문으로 사업을 다각화해 엄청난 성공을 거뒀습니다. GE의 이런 성공 신화 뒤엔 남들보다 몇 발 앞선 유망 사업 발굴 능력, 최고경영진의 뛰어난 리더십이 뒷받침됐다는 것이지요. 현대.기아자동차 그룹은 일본 도요타자동차 공장에 수시로 임직원들을 보내 생산 노하우나 재고 관리 기법 등을 배웁니다. 흥미로운 건 도요타를 벤치마킹하려는 곳이 자동차 회사들뿐만이 아니라는 거지요. 삼성전자나 우리투자증권 같은 다른 업종 임직원들도 근래 대거 도요타 연수를 가고 있습니다. 우리투자증권에서 도요타 연수를 하고 온 임직원이 470여 명에 이른다고 해요. 도요타의 저력과 경쟁력이 무엇인지 현장에서 직접 배워 오라는 뜻이지요.

실제로 '도요타식 경영'은 이미 1990년대부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해 왔습니다. 철옹성 같았던 제너럴 모터스(GM).다임러 크라이슬러.포드의 미국 자동차 ' 빅3' 아성을 무너뜨리고 올해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명실상부한 1위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죠.

◆한국 기업도 벤치마킹 반열에=기업들의 벤치마킹은 배울 게 있다면 상대가 어디든, 영역을 가리지 않는 '전방위 학습'의 양태로 바뀌고 있습니다. 선진국의 기업들이라도 개도국 기업에 배울 게 있으면 언제든 달려옵니다. 적잖은 해외 기업의 임직원들이 삼성전자나 SK텔레콤.현대중공업 같은 한국의 글로벌 기업을 배우겠다고 방한 러시를 이룹니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일부 업종에선 무섭게 성장해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죠. 가슴이 뿌듯한 일입니다. 가령 반도체를 포함한 정보기술(IT), 모바일 통신, 조선 등의 업종에서 세계 1, 2등을 다툴 정도로 엄청난 경쟁력을 갖게 된 덕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나가도 고민은 끝이 없나 봐요. 일단 2, 3위권 업체들의 추격을 뿌리쳐야 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1등 기업의 경우 벤치마킹할 대상이 더 이상 없다는 점이죠. 삼성전자나 현대중공업 같은 국내 초일류 기업들은 어느새 세계 정상급 업체가 되면서 쫓아가면서 배울 대상이 없어진 겁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고심 끝에 지난해 말부터 '창조 경영'을 되뇌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거예요.

창조 경영은 말 그대로 '무(無)'에서 '유(有)'를 일궈내는 새로운 기업 경영 방식입니다. 선진기업 따라서 배우기에 익숙했던 국내 기업들엔 무척 생소한 일입니다. 기업 경영에 관한 웬만한 사안들은 이제 앞장서서 스스로 깨우치며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이제 국내 글로벌 기업들이 해외에서도 돌풍을 일으킬 만한 첨단 경영 기법과 전략을 찾아낼지 한번 기대해 봅시다. 성공하면 전 세계 기업들이 앞다퉈 벤치마킹을 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뻔질나게 찾는 흐뭇한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표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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