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왜 정전체제 흔드나(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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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핵문제로 몰리고 있는 북한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 북한과 미국의 접촉,유엔안보리가 설정한 추가사찰 시한 등을 앞두고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관리해온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일방적으로 철수,국면전환을 위한 승부수를 내놓은 것이다. 혹 군사분계선에서 조그마한 충돌이라도 벌어질 경우 위기관리가 불가능해져 더 큰 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이 이러한 강수를 들고 나오는 이유는 뻔하다. 한반도에 군사적 충돌의 위기감과 심리적 불안감을 증폭시킴으로써 핵사찰 문제로 집중된 국제적 관심을 분산시키며,핵카드의 효용을 극대화하겠다는 속셈이다. 북한은 현재 영변의 핵시설에 대한 추가사찰을 받아들이든가,유엔안보리의 제재 수순을 감수하든가 해야 할 기로에 서 있다. 그러나 벼랑끝까지 버티는 북한의 외교교섭행태로 보아 안보리에서 제재문제를 다룰 때까지 끌고가다가 그 직전에 추가사찰 협상에 나서게 될 것으로 관측돼 왔다.
이러한 막다른 처지에서 북한은 안보리의 제재논의에 대한 대응카드로 군사정전위 철수라는 새로운 카드를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는 핵문제뿐 아니라 군사적인 긴장이 감도는 분쟁지역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제재논의를 어렵게 하는 효과를 거두겠다는 것이다.
북한이 지난달 28일 미국에 대해 정전협정을 미국과의 평화협정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취한 행동들은 그러한 속셈들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날 북의 공군 훈련기들이 휴전선 근처까지 남하비행한 것이라든가,사병들이 비무장지역인 공동 경비구역에서 무장시위를 한 것들은 모두 치밀하게 계획된 행동으로 봐야 한다. 북한은 이러한 행동을 통해 핵협상에서 이득을 볼뿐 아니라 대남전략면에서도 심리적 불안감 조성에 따른 남쪽의 경제 등 사회 모든 부문에서의 위축효과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일반적으로 군사정전위로부터의 철수를 통고하며 그들이 요구하는 새로운 평화체제가 마련될 때까지 현재의 휴전협정을 준수하고,군사 직통전화는 그대로 운용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정전체제를 무용화하려고 시도해왔던 것으로 미루어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 자체가 중대한 협정위반으로 정전체제를 깨뜨려 나가는 첫번째 시도로 볼 수 있다. 북한의 이러한 시도가 용인된다면 다른 형태로 위기를 조성하는 협정위반이 되풀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은 예측이 가능한 상대가 아니다. 따라서 정전체제를 유지하고 위기관리 기능을 가진 군사정전위원회가 무용화되면 자칫 무력충돌을 불러올 위험도 있다. 정부로서는 안이하게 북한의 「도발징후가 없다」고 국민을 안심시키는데만 주력할 일이 아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직시하고 대비태세를 갖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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