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2004 원숭이 해의 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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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설까지 쇠었으니 새해가 완연하다. 새로운 해가 오면 나는 띠 동물이 상징하는 소원 성취, 운수 대통, 민속 의미가 궁금해진다. 조상들 역시 띠 동물의 외모나 특성, 장단점, 덕성 등을 종합해 한해 운수와 민속관행 등을 점치며 삶을 부드럽고 윤택하게 하려고 꿈을 지폈다.

원숭이는 두더지와 함께 영장류(monkey and apes)에 속해 7천만년 전 인간의 뿌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2천여만년 전 두발로 허리를 세워 걸으며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던 인간 승리는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고 부단한 시행착오의 극복이었을 것이다.

원숭이는 물체를 잡을 수 있도록 손이 대향성이어서 나무와 지상 생활에 적합하게 돼 있다. 가슴에 한 쌍의 젖이 있고, 입체시가 가능한 눈을 가졌다. 얼굴에 털이 없고 지능이 높을 뿐 아니라 하는 짓까지 우리와 너무 닮았다.

일본 고시마(幸島)섬의 일년반짜리 이토라는 원숭이는 1953년 감자를 씻어먹는 방법을 개발, 9년 뒤 동료의 73.4%에게 이를 전파했다. 모래밭에 흩어진 보리를 골라먹기 위해 물에 던졌다는 '보리일기'로 미루어 언젠가는 인간을 추적해올 것이라고 동물학자 오창영은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 원숭이는 스님보좌.모성애.꾀.재주가 도통한 영물이다. 만능 재주꾼.자식과 부부지간의 극진한 사랑이 있는 섬세한 동물로 쥐.용띠와 잘 맞는다는 속신도 있다. 이집트.인도.중국에서는 개코원숭이를 건강.성공.수호의 상징으로 신성시했으나,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인디오는 사자의 악마라 믿고 있다.

우리 민속심성에서는 재수없는 동물이라 하여 일부러 잔나비라고 한다. 잔나비는 원래 신자(申字)의 풀이인 '납'이 작은 것을 의미하는 '잔'과 접미사 '이'가 붙어 '잔납이'라 한 것이 연음된 것이다.

고고미술에서도 신라 토우에서 과장된 생식기를 붙들고 있는 원숭이, 통일신라 무덤 주위돌, 불탑과 부도, 고려의 불구와 구리 거울, 고분벽화.석관.청자.백자.도장.연적.항아리.걸상.장식에서 흉내를 잘내는 장난꾸러기, 아기를 안고 있는 모성애 상징으로 형상화돼 있다. 조선시대 그림에서 원숭이는 사슴.소나무가 함께 한 십장생 그림, 불로장수의 천도복숭아 원숭이로 예술성이 돋보인다.

강화도 전등사 대웅전 추녀 밑의 원숭이는 도목수가 정성과 기술을 다해 절을 짓던 중 인근 주막의 예쁘장한 여자의 유혹에 빠져 품삯과 패물을 다 날린 후 배신의 아픔을 못이겨 여자에게 추녀를 받드는 벌을 주었다는 이야기 상징이다.

갑신년에 생각나는 이야기 하나. 포수가 사냥 나갔다가 새끼 원숭이를 망태기에 넣어 집으로 가져와 잘 길렀다. 어느날 포수의 아내가 빨래하러 나간 사이 원숭이도 빨래하는 시늉을 낸다고 솥에 가서 뜨거운 물을 떠다가 갓난아기에게 부었다. 아기가 뜨거운 물에 데어 상처를 입은 것은 당연한 일. 그러자 원숭이는 제 잘못을 알고 아기를 안고 천연의 약수 못을 찾아가 그 물에 씻겨 낫게 했다고 한다.

원숭이까지도 실수를 인정하고 포수의 은혜에 속죄하는 세상에 우리의 선량들은 국리민복의 국익을 원숭이 재판하듯 내팽개치지 않았는지.

올해만큼은 '원숭이 재판 같은 도둑 정치' '아침에 세개, 저녁에 네개(朝三暮四)'같은 속담과는 담쌓고 지냈으면 한다. 서유기(西遊記)에서 스님을 도와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온 손오공처럼 용감.장난.지혜.축귀의 여의봉(如意棒)을 가지고 민족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도록 지도자들은 대담한 기획과 세심한 준비를 게을리하지 말기를 기원한다.

李鐘哲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약력:서울대학교 인류학 학사, 영남대학교 대학원 사회인류학 박사, 국립전주박물관 관장, 국립민속박물관 관장,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회 제4분과위원 겸 박물관분과위원, 제2대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차관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