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리뷰] 조재현 13년만에 다시 무대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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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겨울의 '에쿠우스'

딱 13년 전이었다.서울 운니동 실험극장에선 연극 '에쿠우스'가 장기 공연되고 있었다. 찬 바람이 쌩쌩 불던 한겨울, 버스 정류장에서 '에쿠우스'를 보고 난 사람들이 저마다의 충격을 토해내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조재현이 무대에 있었다. 스물여섯살의 젊디 젊은 배우였다. 그는 두려움도 몰랐다. '연극 배우라면 일생에 꼭 한번 맡고 싶은 배역'이라는 '에쿠우스'의 주인공 알런 역을 맡고도 그는 거침이 없었다. "일단 부딪치면 못할 게 없다"는 배짱과 자신감으로 무대에 오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왠지 버거웠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배역과 완연한 하나가 되지 못했다. 70㎏이었던 몸무게는 8개월의 장기공연이 끝나자 7㎏나 빠져 있었다. '에쿠우스'의 발톱은 길었고, 상처는 오래도록 아물지 않았다. 13년의 세월이 흐르고서야 조재현은 그 이유를 알았다.

#2004년 겨울의 '에쿠우스'

26일 혜화동의 실험극장 사무실에서 조재현을 만났다. 29일부터 막이 오르는 '에쿠우스'(동숭아트센터 동숭홀, 3월 7일까지, 02-762-0010)에서 다시 알런 역을 맡은 그는 한 마리 '연어'였다. '에쿠우스'와의 재회를 위해 13년이란 세월의 물살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알런에 대한 그리움이자 배우로서의 본능이었고, 못다 푼 숙제에 대한 오래된 아쉬움이었다.

그는 '13년 만'이라는 질문부터 반박했다. "인간의 이성보다 원시적인 감성에 더 호소하는 '에쿠우스'가 관객에게 큰 충격이듯이, 연기하는 배우에게도 충격 그 자체"라며 "'에쿠우스'는 아무리 접어도 접혀지지 않는 기억"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대본을 직접 펼친 것은 13년 만이었다. 그는 "예전에 알런과 하나가 되는 일이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며 "배우로서의 갈증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갈증을 알아야 했다"고 답했다.

극의 주제인 '이성과 감성, 정상과 비정상, 현실과 신화 사이의 간격'에 대한 자신만의 시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91년에는 내가 맡은 알런만 큼지막하게 보였는데, 이젠 정신과의사 다이사트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날아와 꽂힌다"고 말했다. 바다까지 내달렸다가 되돌아오는 '연어'의 몸에는 세월의 힘이 박혀 있었다.

#'광기'의 연기, '광기'의 배우

영화 '나쁜 남자'에서 보여준 조재현의 광기는 강렬했다. 알런 역시 쇠꼬챙이로 마굿간에 있는 말들의 눈을 찌르고야 마는 배역. 어찌 보면 '조재현표' 광기를 드러내기에 딱 맞는 배역이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달랐다. "무대 위의 광기는 결국 폭발이다. 하지만 배역과의 일체감은 폭발하는 대목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오히려 그는 '폭풍' 대신 '고요'를 언급했다. "극이 물결처럼 잔잔한 순간에 느끼는 배역과의 일체감이야말로 혼신의 연기"라고 말했다. 관객의 가슴을 때리는 '망치'는 몰아치는 폭풍이 아니라, 침묵보다 고요한 순간에 있다는 얘기였다.

91년 '에쿠우스'무대에 처음 섰을 때 그의 아들 수훈이는 세살이었다. "그때 칭얼대지도 않고 객석에 앉아 있던 아들이 이젠 열여섯살이 됐다"며 "세월만큼 깊어진 연기를 이번 '에쿠우스'에 녹이겠다"고 말했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김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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