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야구 충남 첫우승의 주역 공주고 金鄕文 당시 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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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전국을 制覇했다,밤새운 忠淸道」.
창단 3년의 공주고가 제11회 대통령盃를 품에 안은 다음날인77년 5월18일字 中央日報는 온통 공주읍민들의 환호성과 감격으로 가득 찼다.
당시 공주고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전통의 강호 부산고와의결승에서 4-3으로 역전승,충남지역 고교로선 처음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드라마를 연출해냈다.
우승의 주역은 공.수에서 맹활약했던 金卿文(37.삼성라이온즈코치).주장으로 포수 마스크를 쓴 金은 4번타자까지 맡아 최우수.타격.최다안타상을 휩쓸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하늘엔 세스나기가 오색 연막탄을 터뜨렸고 상가를 철시한채 거리로 나온 3만7천여 읍민들의 환영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공주고 야구부가 금의환향하던 날 대전역은 10만 인파로 뒤덮였고 공주 시가지 역시 축제 분위기였다.
金은 투수 吳英世(대전 청란여고 교사).徐鍾浩(공주고 감독)씨등 당시 동료들과는 지금도 매년 11월 OB전에서 만나 그때의 감격을 되새긴다.
또 결승전에서 공주고에 무릎을 꿇었던 부산고 에이스 楊相汶(롯데자이언츠코치)은 金의 고려 대 1년 후배로 한솥밥을 먹어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대학시절 잠시 주춤했던 金은 졸업과 함께 OB 유니폼을 입고「불사조」朴哲淳을 리드,우승을 이끌어내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고3때 두차례의 머리 부상,대학시절 허리 부상으로 선수생활에 위기를 맞았으나 불굴의 정신력으로 이겨냈다.
『선수생활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하는 데까지 해보자고 이를 악물었죠.그 후유증으로 프로에 진출해서는 매일매일을 마지막경기라고 생각하며 그라운드에 나갔어요.』 2년간의 미국 야구유학을 마치고 지난해 10월 귀국,코치로 새로운 야구인생을 시작한 김경문.국민학교 시절부터 흠모하던 禹龍得감독과 일하게 돼 기쁘다는 그는 지도자로서 또다른 인생을 걷고 있다.
대통령배대회에 출전하는 새까만 후배들에게 김경문은 주문한다.
무엇이든 한가지 확실히 잘하는 선수,자기 색깔과 주장이 분명한 선수가 되어달라고.
〈金廷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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