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보다 좋은 도시가 돼 드립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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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잡아봐라.” (견우는 그녀의 하이힐을 신고 절뚝거리며 걸어간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엽기적인 그녀, 전지현은 하이힐 때문에 발이 아프다며 남자친구에게 신발을 바꿔 신자고 제안한다. 자상한 견우는 그녀에게 운동화를 벗어주고 자신은 하이힐을 신은 채 힘겹게 캠퍼스를 걷는다. 영화 개봉 후, 한국은 물론 중국 캠퍼스에서도 이 장면을 흉내 내는 커플이 종종 있었고, 견우처럼 난생 처음 하이힐을 신어 본 남학생들은 하나같이 고통을 호소했다.
여자에게 하이힐은 애증의 존재다. 각선미를 위해 신기는 해야 하는데, 발이 여간 아픈 게 아니니까.
하지만 이제 하이힐을 대신 신어주는 남자친구가 없다고 슬퍼할 필요가 없다. 남자친구보다 더 자상한 도로정책이 여성을 기다리고 있다.


여성친화도시로 변신하는 김포시
김포시가 여성친화도시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오는 12월에 착공에 들어가 2012년에 공사가 완료되면 김포시 장기동, 운양동, 양촌면 일대가 53,890세대 인구 20만 명 규모의 여성친화도시로 탈바꿈하게 된다.
여성친화도시의 보행로는 특수 우레탄 소재의 폭신폭신한 포장재로 시공돼, 여성들이 하이힐을 신고 걸어도 발에 무리가 가지 않는 환경을 제공한다. 또한 보도블록 사이로 구두 굽이 끼지 않도록 폭을 조정하므로 하이힐을 신고도 바닥에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하게 걸을 수 있다. 늦은 밤에도 여성이 안전하게 조깅을 하거나 걸을 수 있도록 CCTV와 야간조명 등 방범시설도 함께 설치할 예정이다.

‘여행(女幸) 프로젝트 2010’ 발표한 서울시


서울시가 지난 7월 23일 ‘여성이 행복한 도시’ 프로젝트 4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교통, 주택, 문화 등 생활 속에서 겪게 되는 여성의 불편사항을 제거하는 ‘여행(女幸) 프로젝트 2010’에는 총 7천억 원의 예산이 투입될 예정이다. 매년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보도 정비는 보도블록 자체를 다시 교체하기보다는 평탄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주력하고 있어 예산 낭비 또한 줄일 수 있게 된다.
사실 임산부와 유모차를 끌어야 하는 여성, 하이힐을 신은 여성, 노약자 등 이른바 ‘보행약자’들은 보도상의 차량, 볼라드로 인해 적지 않은 불편을 느껴왔다.
서울시는 이 같은 불편사항을 개선하기 위해 보도 턱을 낮추고 보도포장이 평탄하게 관리되도록 하는 보도정비를 추진하고 있다. 우선 올해는 총 193개소를 대상으로 현재까지 총 90개소의 사업을 완료했고 10월말까지 103개소를 추가 정비할 계획이다.
보행로는 평탄하게 하고 차량은 오르내리도록 하는 험프형 구조가 대표적인 작업이다.
험프(hump)형 횡단보도란, 횡단보도의 높이를 보도에 맞춰 높인 것으로 보행자에게는 인도와 보도 사이의 턱을 없애주는 대신, 차량에게는 과속방지턱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호주의 시드니 등에는 이 같은 험프형 횡단보도가 일반화돼 있다. 보도 턱도 최소 폭으로 낮추게 된다. 기존에는 횡단보도 폭만큼 보도 턱을 낮췄지만 유모차나 휠체어 이용자 등 신체적 약자의 통행에 불편이 없도록 최소 폭으로 보도 턱을 개선한다. 따라서 기존의 볼라드는 자연스럽게 제거된다.
어두컴컴하고 열악한 환경의 지하보차도 또한 여성을 배려한 환경으로 바뀐다. 심야 시간대에 캄캄한 지하차도는 여성 혼자 걷기에는 안전하지 못한 장소다. 또 차량소음과 매연도 심하다. 이 같은 이유들로 이용이 꺼려졌던 지하보차도를 안심하고 쾌적하게 걸을 수 있는 환경으로 개선해 나갈 예정이다.
보차도 조명등을 10룩스 이상으로 밝게 하고, 오래된 등과 기구들을 교체하거나 추가 설치하는 한편, 보도 내부 마감재도 깨끗이 하고 차도와 보도에 투명 방음판도 설치한다.

도시가 여성위주로 진화하고 있다
김포시와 서울시뿐만 아니다.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현재의 웰빙 트렌드에 맞게 건강도로 가꾸기에 정책초점을 맞춰 가고 있다. 조깅코스, 산책로를 신설하거나 도로를 쾌적하게 바꾸고 어두운 길은 조명을 밝게 하고 있다. 특히 강을 끼고 있는 도시에서의 변신은 시각적으로 먼저 확연하게 드러난다.
젊은 층이 많이 사는 지역이나 신흥 도심지역에서도 여성보행자를 위한 배려가 남다르다. 블록 위주였던 인도가 하이힐을 신은 여성이나 유모차를 밀며 산책하는 젊은 새댁들을 위해 피로를 줄이고 우아하게 걸을 수 있는 길로 변신하는 등 섬세한 도시설계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아무래도 ‘여성이 만족하면 대한민국이 만족하는 정책이 된다’는 속설이 통하는 듯하다.

장치선 객원기자 charity19@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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