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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래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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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면 나는 ‘퍼스트 래디(First Laddie)’로 불릴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 말로 ‘래디’는 ‘젊은이’ ‘총각’이라는 뜻이다. 발음도 ‘레이디(lady)’와 비슷해 그럴싸하다. 하지만 사전에 있는 정확한 표현은 ‘퍼스트 젠틀맨(First Gentleman)’이다. 미국에서 아직 이 말이 쓰인 적은 없다. 일부 드라마에서 쓰였을 뿐이다. 주지사의 부인도 퍼스트 레이디라고 부르지만 여성 주지사의 남편은 아직까지 ‘미스터(Mr.)’로만 불렀다.

‘퍼스트 레이디’라는 말을 만든 미국에서도 초기에는 여러 가지 표현을 썼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부인은 ‘레이디 워싱턴’으로, 존 애덤스 대통령의 부인은 ‘미세스 프레지던트’로 불렸다. ‘여왕폐하(Her Majesty)’ ‘여왕(Queen)’이나 프레지던트의 여성형인 ‘Presidentress’라는 신조어(新造語)까지 동원됐다. 퍼스트 레이디란 말을 처음 쓴 것은 1849년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의 부인 돌리 매디슨의 장례식 조사(弔辭)에서다. 돌리는 홀아비인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때부터 뒤이어 취임한 남편 매디슨의 임기까지 무려 16년간이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다.

케이티 마튼의 표현대로 퍼스트 레이디는 막강한 ‘숨은 권력자(Hidden Power)’다. 우드로 윌슨이 1919년 10월 반신불수에 언어장애가 됐을 때 이디스 윌슨은 백악관 접근을 막고 1년5개월간 결재를 대신하기도 했다. 대통령의 권한 승계 방법을 헌법으로 정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퍼스트 레이디는 아르헨티나의 에바 페론처럼 국민적 인기로 정권 안정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처럼 부담을 줄 수도 있다.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의 부인 세실리아는 로라 부시의 초청을 거절하는 등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에 얽매이기를 거부하지만 국내 여론은 좋은 편이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을 챙기느라 간섭이 너무 심해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았다. 육영수 여사는 모두 무서워하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청와대 내 야당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연말, 권양숙 여사가 신문 좀 보라고 하고 이틀에 한 번은 다툰다고 밝혔었다. 그런 권 여사가 이라크 파병과 평택 미군기지 이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운동에 앞장서 온 김정수씨를 제2부속실장으로 뽑았다. 권 여사도 야당 노릇을 하려는 것일까, 궁금하다. 

김진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