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중견기업] "브랜드 없이도 잘 팔린다” 화장품업계 숨은 강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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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화장품 용기의 바닥 또는 뒷면을 보면 제조원과 판매원이 별도로 표시된 제품이 많다. 국내산 화장품 10개 중 2~3개는 ‘제조원:한국콜마’로 적혀 있다. 한국콜마는 국내외 160여 개 화장품 회사에 제품을 공급하는 화장품 개발·제조 전문업체다. 소비자들이 쓰는 유명 브랜드 화장품 상당수가 사실은 한국콜마가 만든 것이다. 국내 화장품 업체 A·L사, 외국의 존슨앤드존슨·허벌라이프 등이 한국콜마의 오랜 거래처들이다.

 한국콜마는 1990년 설립되면서 화장품 산업의 지각 변동을 불러왔다. 이전까지 한 화장품 회사가 생산부터 판매까지 전 과정을 도맡았던 것이 제조 전문, 판매 전문, 종합 브랜드 메이커로 세분화됐다. 자체 브랜드와 유통망이 없는 제조업체들이 속속 생겨났으며, 미샤·더페이스샵과 같은 유통 전문회사도 나타났다.

 대웅제약 부사장을 지낸 창업주 윤동한(60) 회장은 “기업 고객뿐 아니라 최종 소비자인 개인 고객까지 제조원이 한국콜마이면 품질에 대해선 안심한다”고 자랑했다. 브랜드의 본질이 ‘고객과의 약속’이라면, 한국콜마 자체가 브랜드인 셈이다.

 ◆브랜드 없이 기술력으로 승부=윤 회장은 영남대 경영학과 졸업 후 농협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사업가의 꿈을 키우기 위해 제조업체인 대웅제약으로 자리를 옮겼다. 짧은 시간에 일을 많이 배우기 위해 중견기업을 택했다고 한다. 제약회사와의 인연이 그를 화장품 사업가로 만들었다. 화장품은 의약품의 사촌 격으로, ‘친정’인 대웅제약과의 직접 경쟁은 피하면서 그에게 낯설지 않은 분야였다.

 일본콜마와 합작으로 회사를 세우고,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는 “마케팅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자할 여력이 없어 제조 전문업체로 방향을 잡았다”고 설명했다. 대신 기술력으로 승부하기로 했다. 제조자 자체 개발 생산(ODM)이라는 새 개념을 화장품에 도입했다. 주문자가 건네준 처방과 지시에 따라 생산하는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OEM) 방식과 달리 제조업체가 기술을 개발해 납품하는 방식이다. 상품 기획부터 개발, 생산, 품질 관리, 출하에 이르는 과정을 맡는다.

 ODM은 부가가치가 훨씬 큰 만큼 기술력과 연구개발(R&D) 능력이 뒷받침돼야 했다. 이 회사는 R&D 인력을 직원의 20%대로 유지하고, 연매출의 6% 정도를 연구개발비로 지출하고 있다. 윤 회장은 “생산 품목의 98%를 ODM으로 만드는 것이 매년 10~20%씩 성장한 비결”이라고 진단했다.

 ◆원칙과 신뢰의 경영=ODM 업체로서 윤 회장이 굳게 지키고 있는 세 가지 원칙이 있다. 화장품 처방을 공개하지 않고, 같은 제품을 다른 거래처에 팔지 않으며, 거래 회사의 비밀을 보호하는 것이다. 기술과 신뢰가 자산인 ODM 업체로서 생존을 위한 전략이다. 윤 회장은 “철저한 관리와 연구를 통해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주문업체인 대기업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업 초창기 판로 개척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원칙에 어긋나는 주문은 받지 않았다. ‘무자료로 거래하면 주문을 하겠다’는 유혹이 많았으나, 일감이 없어 공장 문을 닫을 위기에까지 몰리면서도 버텼다. “한 번이 두 번을 낳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훗날 치르는 대가는 훨씬 클 것”이라는 소신 때문이었다. 신뢰와 원칙을 중시한 그의 경영방식은 외환위기 때 빛을 발했다. 환율이 800원에서 1800원으로 치솟으면서 수입 원료값이 크게 올랐지만, 그동안 쌓아온 신용을 바탕으로 1년 넘게 외상으로 원료를 조달할 수 있었다.

 ◆세계로 진출=한국콜마는 2002년 제약 사업을 시작했다. 윤 회장은 “화장품 ODM 사업을 하면서 쌓인 노하우를 제약에 접목해 기술 융합을 시도하기 위해 사업을 다각화했다”고 설명했다. 의약품 같은 화장품, 화장품 같은 의약품이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는 시점이었다. 한국콜마는 미백, 주름 개선, 자외선 차단 등 기능성 화장품 품목 허가 700건을 갖고 있다. 지난해 전체 매출액 850억원 중 제약 부문은 약 200억원(24%)을 차지했다. 올해 매출 목표는 1000억원으로 잡았다. 생산 원가 기준이기 때문에 판매 회사 기준으로 볼 때 적지 않은 규모다. 10여 개 화장품 제조 전문업체 중 시장점유율은 35%로 업계 선두를 달리고 있다.

 브랜드에 대한 갈증은 없을까. 윤 회장은 “완성품 시장 진출 계획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전문화 시대에는 전문성을 살린 기업이 설 자리가 더 많아질 것”이라며 “지금보다 더 세분화돼 연구개발 전문과 상품개발 전문 회사가 각각 생겨날 것”으로 전망했다. 윤 회장은 화장품 산업의 미래를 낙관했다. 화장을 하는 연령대가 넓어지고 남자들의 화장 수요도 늘고 있다. 물론 그만큼 경쟁도 치열하다. 국내 시장이 어느 정도 성숙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판단에 따라 중국 공략에 적극 나설 방침이다. 5월 베이징에 법인을 설립했고, 이달 중 현지에 ODM 공장을 착공한다. ODM 제품 공급뿐 아니라 화장품 공장 컨설팅으로 영역을 확대할 계획이다. 화장품 공장을 설계해 짓고, 기술을 전수하고, 직원을 훈련시키는 ODM 종합 솔루션을 제공할 방침이다. 윤 회장은 “큰 회사가 아닌 강한 회사,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화장품·제약 R&D 회사를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한국콜마
■설립: 1990년

■대표이사: 윤동한 회장, 강세훈 대표(화장품 부문), 조홍구 대표(제약 부문)

■본사: 충남 연기군 전의면

■사업장: 서울사무소(서울 서초동), 피부과학연구소·생명과학연구소·화장품 공장·제약공장(충남 연기군, 인천 십정동, 경기 부천시), 해외법인(중국 베이징)

■임직원 수: 400여 명

■생산품목: 화장품, 기능성 화장품, 의약품, 의약외품 등

글=박현영 기자
사진=양영석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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