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술] 아프간 인질 사태가 남긴 것 <상> 국가의 재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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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네티즌이 어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제기한 "아프간 피랍자 구출 비용 청구하라"는 청원에 3일 오후 7시 현재 4만2000명이 넘는 이들이 서명했다. 피랍자와 피랍에 관련된 단체가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양상은 2004년 김선일씨 피랍 때와 뚜렷하게 비교된다.

김선일씨 납치 당시 국방부 홈페이지를 비롯한 주요 포털 사이트에 나타난 반응은 "꼭 살려야 한다"는 내용이 압도적이었다. 이번엔 달랐다. 테러 위험 때문에 가지 말라고 한 곳에 간 이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극단적 반응까지 나온다. 국가의 책임과 개인의 자유의 경계는 새롭게 설정돼야 하는가.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42일간의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태는 이 같은 근대적 국가관을 대한민국 국민에게 학습시켰다. 두 명의 인질이 살해되면서 전 국민이 애를 태웠고, 국제적으로 '테러범과의 협상'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등 '값비싼 수업료'가 지불됐지만, '국가 재발견'의 계기가 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렇다면 국가의 국민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국가의 재발견="위험 지역을 선택해 선교할 자유도 있을 것이다. 다만 선교의 자유를 위한 개인의 선택이 국가에 부담이 돼 돌아온 것은 문제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 설정과 관련, 우리 사회에서 최초로 제기된 문제다."(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어떠한 재난 사태라도 국민에 대한 국가의 책임이란 원칙은 적용된다. "국가보다 종교를 선택했다 해도 대한민국 여권을 소지한 국민이라면 국가는 최선을 다해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김병국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는 뜻이다. 김 교수는 "이번 사태 해결에 꼭 정부나 국정원이 나서 테러범과 협상해야 했는지 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야겠지만, 그것은 국가의 책임이란 원칙과는 별도의 문제"라고 말했다.

국가는 국민과 주권과 영토를 보호할 책임을 진다. 하지만 우리에겐 국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뿌리가 깊다. 식민지 시기 우리는 국가 없는 '민족'으로 존재했다. 100여 년의 근현대사에서 국가의 의미가 폭력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배경이다. "식민지 국가의 경험은 국가를 불신하는 문화적.역사적 배경으로 존재해 왔다" (김용직 성신여대 교수.정치학)는 이야기다.

해방 이후 권위주의 국가 역시 그 같은 불신에 일조했다. 이상민(한양대.사회학) 교수는 "권위주의 경험까지 겹쳐 국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지만, 이번 인질 사태를 통해 결국 국가가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국가와 정권의 개념 혼동도 문제라고 했다. 그는 "국가 혹은 정부와 정권은 다른 개념인데 많은 이들이 혼용하고 있다"며 "내가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정권을 잡았다고 해서 국가를 부정적으로만 여기는 경우가 개념 혼동의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했다.

◆국가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문제가 간단치 않다. 복잡한 숙제가 함께 제기됐다. 개인의 '잘못된 선택'이 개입된 경우까지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정부가 이번 사태와 관련된 이들에 대해 구상권 청구 계획을 밝힌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아프가니스탄으로 봉사.선교 활동을 간 것은 국민의 기본권인 '거주 이전의 자유'에 해당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지역은 국가가 여행 금지 지역으로 정해 놓은 곳이었다. 국민의 생명 보장을 위해 국가가 개인의 기본권을 제한한 것이다.

이와 관련, 임지봉(서강대.법학) 교수는 "국가가 합당한 필요에 의해 여행을 제한했기 때문에 그것을 어긴 인질들을 윤리적으로 비난할 수는 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그들도 당연히 국가가 보호해야 하는 국민"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구상권 청구가 법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해 임 교수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개인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유주의연대 신지호 대표는 "'공무집행 중 피랍' '국적 비행기 피랍' '국가 경고에 반해서 피랍' 등 세 가지 경우로 분류해 대응하자"고 제안하며 "국가는 어느 경우라도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그렇다 해도 '공무집행 중 피랍'과 여타의 경우를 똑같이 취급할 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호기 교수는 "정서적 접근보다 공론장에서 공적인 토론을 붙여 봐야 할 문제"라며 "국가의 책임이란 일반 원칙도 중요하지만 개별 사례마다 다른 판례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영(성균관대.정치외교학) 교수는 "예전엔 국가의 책임만을 묻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번 사태는 국가의 책임과 개인의 책임이 얽힌, 이전에 볼 수 없던 복합적인 문제"라고 했다. 그는 이어 "개인주의에 기반해 발전하는 자유주의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사태와 비교할 때 국가가 납북자.국군포로 문제에는 얼마나 관심을 갖고 책임을 다했는지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배영대.강승민 기자

◆구상권(求償權)=채무 관계에서 발생하는 법률 용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빚을 갚은 사람이 다른 연대 채무자나 주된 채무자에게 상환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리킨다. 정부가 아프간 피랍 사태와 관련해 이들에게 구상권 청구 계획을 밝힌 것은 정부가 피랍자 석방을 위해 쓴 비용을 일종의 채무 관계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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