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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화씨, 탈레반 살해위협 속 바지에 42일간 피랍일지 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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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탈레반에 납치됐다가 지난달 29일 풀려난 서명화(29)씨가 인질 억류 기간 중 탈레반의 감시를 피해 자신의 바지에 기록한 피랍일지. 서씨는 흰색 바지 안쪽 면에 인질들의 이동 경로와 건강 상태, 제공된 음식의 종류, 개인적 기도 제목 등을 기록했다. [카불=연합뉴스]

'8월 15일(수) 아마드 집으로 이동, 17일(금) 몸살.배탈, 18일(토) 주스로 만든 죽 먹음, 19일(일) 시편 84, 21일(화) 머리 감음'.

탈레반에 억류됐다 풀려난 인질 중 한 명인 서명화(29.사진)씨가 자신이 입었던 바지에 42일간의 '피랍 일지'를 꼼꼼히 기록한 것으로 밝혀졌다. 서씨는 지난달 31일 아프가니스탄 카불 세레나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히 적힌 흰색 면바지를 들고 나왔다. 탈레반 무장단체에 납치돼 억류 생활을 하면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이같이 꼼꼼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다. 발각되면 자칫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바지 안쪽에는 날짜별로 은신처 이동과 식사, 건강 상태를 비롯한 피랍 생활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피랍 첫날인 7월 19일자에는 '(목) 피랍:총 2발, 봉고 이동, 짐 검사 후 가져감'으로 기록돼 있다. 그 후 이틀은 '(금) 이동 걸어서(너무 춥고)' '(토) 시편 읽고, 신발 신고 잠'이라고 비교적 짧게 적었다. 서씨는 "필기도구를 가지고 있던 일행이 있어 처음엔 각자 일기를 썼는데, 탈레반이 수시로 수색해 압수해 갔다"며 "다행히 하얀 바지를 입고 있어 7월 24일부터 감시를 피해 바짓단을 걷어 썼다"고 말했다. 그는 "그 이전에 일어난 일은 기억을 되살려 간단히 적었다"고 밝혔다.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세력에 억류된 상황에서도 서씨와 일행들은 예배를 보고, 기도를 했으며, 성경도 읽었다. 하루 일과를 시간대별로 적은 것을 보면 '6:00 아침식사, 8:00~9:00 예배, 1:20 점심식사, 4:30~5:10 기도회(경석(동생 이름) 기도), 7:00 저녁식사, 9:00 sleep'이라고 돼 있었다.

특히 8월 19일에 읽은 것으로 적혀 있는 성경 '시편' 84편에는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들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의 내용이 들어 있다.

서씨는 인터뷰에서 이 같은 기록을 한 동기에 대해 "나가면 사람들이나 가족들이 우리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할 것 같아 간단하게나마 기록해야 되겠다고 생각해 피랍 생활에 대한 기록을 바지에 남겼다"고 말했다. 억류 생활 중에도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자신이 겪은 일을 알려주려고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다.

간호사로 일하던 서씨는 동생 경석(27)씨와 함께 아프간 봉사에 나섰다가 탈레반에 납치됐다.

한편 탈레반에 억류됐다 지난달 29일 풀려난 12명과 30일 석방된 7명이 31일 감격의 재회를 했다. 숙소인 아프간 수도 카불의 유일한 5성급 세레나호텔에서였다. 그러나 이들은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씨가 살해됐다는 소식을 그제야 듣고 오열했다. 풀려난 19명은 1일 카불을 떠나 두바이를 경유, 귀국길에 오른다. 인천공항 도착 예정시간은 2일 오전 6시45분이다.

홍주희 기자

◆서명화(29)씨=샘물교회 전도사 이성현(33)씨와 올해 초 결혼한 새내기 주부다. 대학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했으나 그만두고 포천중문의대 간호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졸업한 뒤 2001년 경기도 분당 서울대병원에 신경과 간호사로 일하다 미국 유학을 하려고 4월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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