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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의펜화기행] ‘달 희롱’ 을 허하노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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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최고의 정자 답사코스로는 담양 일대와 함양의 화림동(花林洞) 계곡을 손꼽습니다. 담양의 대표 정자는 소쇄원(瀟灑園)이고 화림동에서는 농월정(弄月亭)이 으뜸입니다.

 덕유산 남쪽에서 발원한 남계천이 흐르는 화림동 계곡의 물길을 따라 거연정·군자정·동호정을 지나면 넓디넓은 반석이 펼쳐집니다. 달바위(月淵岩)라 부르는 반석을 앞에 둔 농월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마루에 한 칸짜리 작은 방을 두었습니다. 휘영청 달 밝은 날 농월정 난간에 앉아 흐르는 물에 달빛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면 ‘달을 희롱한다’는 정자의 이름이 정말 멋져 보입니다.

  이 농월정이 2004년 방화로 추정되는 불로 몽땅 타 버렸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찍어 놓은 사진을 뒤적여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농월정의 전체 모습, 현판, 황룡과 청룡이 조각된 충량뿐만 아니라 5종의 화반에 중건기와 시(詩)를 새겨 놓은 13개의 목판이 모두 컬러 슬라이드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건물의 바깥 모양만 그리는 제가 이렇게 완벽한 자료 사진을 찍은 것은 난생 처음입니다.

  오래된 건물에는 영(靈)이 있다는 말처럼 농월정에 영이 있어 앞일을 예견하고 모든 사진을 찍도록 시킨 것 같은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이만한 자료라면 완벽한 복원이 가능할 것 같아 함양군청에 ‘모든 자료를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연락을 해 놓았더니 슬픈 답이 왔습니다. 설계를 마치고 2억원의 예산도 마련해 놓았는데 공사가 무산됐다는 것입니다. 수소문해 보니 농월정을 세운 지족당 박명부의 후손 10명 중 한 명이 토지 양도에 반대했기 때문이랍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복원된 멋진 모습을 빨리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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