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질은 석방됐지만 '비싼 수업료' 지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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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 원칙을 지키기보다 발등의 불 끄기에 급급한 인상을 남겼다."

국책 연구기관의 한 책임 연구원은 29일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를 수습하면서 외교적 손익을 따져볼 때 한국은 국제적 신뢰와 국격에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다.

피랍자 19명 전원 석방 합의를 이뤄낸 사실은 쾌거다. 그러나 잃은 것도 많았다.

우선 '테러집단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국제사회의 원칙을 거스르고 국가가 직접 협상한 선례를 남겼다.

청와대 천호선 대변인은 "다른 국가들도 이런 문제에 부닥치면 다양한 수준에서 납치단체와 접촉하면서 문제를 푼다. 정도와 방식의 차이일 뿐 예외는 없다"고 해명했다.

한국 정부의 경우 테러집단과 네 차례에 걸쳐 공공연히 직접 협상을 했다는 점에서 정도가 심했다는 지적이다.

국가의 테러집단 직접 협상은 그들에게 납치와 폭력의 효능감을 높여 테러에 대한 유혹을 부추기고 스스로 위상을 격상시키는 문제를 낳는다. 테러 대응의 국제 원칙을 훼손했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의 한국 정부에 대한 평가가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또 다른 외교 소식통은 "해외 출국자 수 1200만 명 시대를 맞아 제2, 제3의 피랍사태가 일어났을 때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제한될 수밖에 없게 됐다"고 주장했다.

평화유지군 파병의 원칙을 재확립할 필요성도 생겼다.

군대 파병이 국익 확충을 목표로 하는 국가적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돌발 상황 앞에서 쉽게 뒤로 밀 수 있는 정책이냐는 문제 제기다.

익명을 요구한 고려대의 한 교수는 아프가니스탄의 동의(의료).다산(공병)부대 같은 평화유지군 파병에 대해 "한국 외교의 위상을 높이는 효과가 크다"며 "한.미 동맹과 반(反)테러전 등 큰 정책 틀에서 결정되는 외교 지렛대가 조기 철군 합의로 손상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2004년 김선일씨 피살 사건 때 '철군 불가' 원칙을 강조하다 비극을 맞았던 학습효과로 인해 조기 철군 카드를 빼든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이로 인해 넓혀왔던 외교 지평을 상당 부분 포기한 게 아니냐는 비판도 나올 수 있다.

석방 외교에 협조를 아끼지 않은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UAE).카타르 등 이슬람권 국가들에 대한 외교적 부채도 적잖은 짐이다.

정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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