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간다>83.중국 낙양-황하의 역사가 흘러온 고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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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洛陽은 화사한 도시였다.길가에 늘어선 건물들의 색깔이 그런 분위기를 자아냈다.다른 도시에서는 누렇게 바랜 색으로 찌들어 있었는데 유독 낙양만큼은 달랐다.그래서 도시 전체가 밝아보였다. 초겨울의 낙양은 나그네를 센티멘탈하게 만들었다.하얀색 건물들과 나란히 서있는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잎을 다떨구어버려 그 큰 키를 감추지 못해 어쩔줄 모르고 있어 그랬다.초겨울의 낙양은 나쁘지 않았다.낙양은 뭐니뭐니 해도 역사의 고도 다.중국역사에서 서안(西安:옛이름은 長安)다음으로 많은 왕조(9개)가 도읍지로 삼았던 곳이다.
낙양은 또한 中原의 핵이다.중원이란 중국의 중심부,북으로는 만리장성과 남으로는 양자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황하의 중.하류지역으로 일찍이 중국의 고대문명(황하문명)이 싹트고 꽃피었던 곳이다. 낙양은 중국대륙 동서남북 어느 곳에서 보더라도 중앙이다.육운과 수운의 연결점인데다 동북아시아의 한랭한 건조기후대와 동남아시아의 온난한 습윤기후대의 접점이면서 河南의 쌀농사지대와河北의 밀농사지대의 경계선에 위치했던 관계로 서로 다 른 생활양식을 가진 여러 민족들이 모여들수 있었다.
여러 이질적인 민족들이 중원땅에 모여들었으나 그들은 공통의 문화체계를 갖게 되었고,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였다.그 결정체가 중화(中華)였다.중화는 부족이나 민족단위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그 속에 들어온 온갖 잡다한 것들이 용해되어 만들어진 위대한 혼합물이었던 것이다.중원땅의 중심인 낙양은 그 혼합물의 구체적 흔적을 아직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발길은 자연스레 그 현장인 용문(龍門)석굴로 향하고 있었다.
석굴은 분명 불교신앙의 한 표현이다.그런데 왜 석굴의 조영이중화세계의 형성에 도움을 주었단 말인가 하고 궁금해 할 수도 있으리라.
용문석굴의 조영은 北魏의 효문제에 의해 시작되었다(서기 493년).북위는 북아시아 유목민의 한 부족인 鮮卑族이 세운 왕조(386년)로서 平城(지금의 大同)으로 도읍을 옮기면서(398년)북중국에 산재했던 여러 왕조들을 쓰러뜨리고 강 북을 통일할정도로 강성해졌다.자신이 夷(문명화되지 못한 야만집단)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선비족은 강북의 민족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신적인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들이 이미 받아들였던 불교를 그 구심점으로 삼기로 했다.이때부터 佛力의 위대함을 피지배민족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석굴을 조영하기 시작했고(460년),그리하여 평성에 운강석굴이 들어서게되었던 것이다.
북위는 석굴조영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고유의 姓인 탁발(拓跋)을 버리고 중국식 성인 元으로 바꾸어버렸으며 기마민족 특유의복장인 胡服과 자신들의 언어인 胡語도 모두 한족의 것으로 바꾸었다(485년 전후).나아가 동성통혼을 금지하고 한족과의 결혼을 장려했다.북위의 선비족은 철저히 漢化했던 것이다.중화의 세계가 그만큼 커진 것이다.
그러다가 수도를 중원의 낙양으로 옮기고(493년)세력도 더욱커지자 낙양 교외 바위벽인 단단한 용문산 서벽에 거대한 석굴을조영하기 시작함으로써 용문석굴이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석굴작업은 그후 4백여년간 계속되어 1천3백 52개의 석굴과10만여개의 불상이 갖추어졌다.낙양시대에 산재한 유물과 유적들,예를들면 낙양박물관.王城공원(商나라시대의 큰솥인 九鼎이 모셔져 있다).關林(관우의 사당).白馬寺(중국 최초의 절)등을 구경하고선 낙양의 이름이 유래된 洛 河를 건너 곧장 남쪽으로 달렸다.시멘트다리가 나타났다.낙하의 지류인 伊河위에 놓인 것이었다.이하를 사이에 두고 두개의 산이 마주 보고 있었다.용문산과향산이었다.
석굴이 있는 용문산은 시내쪽,그래서 다리 입구에서 강바닥으로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석굴의 현장으로 다가갔다.
먼저 賓陽洞이란 석굴군이 나타나면서 용문의 서벽에는 석굴과 造像들이 계속되었다.
불상의 크기나 모양은 제각각이었다.그러나 아쉬운 것은 불상들이 하나같이 흠투성이였다는 것이다.더러는 목이 달아나 버렸고,어떤 것은 몸전체가 아예 없어져 버린 것도 있었으니까.그래서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만든 불감(佛龕)만 휑하니 자리를 지키고있는 볼품없는 것도 있었다.그것이 한두개가 아니다 보니 비어있는 석굴군은 멀리서 보기에 쑤셔놓은 벌집을 연상케 했다.
드디어 용문석굴의 하이라이트인 奉先寺 본존 노사나대불 앞에 이르렀다.대불은 그 앞으로 놓인 20여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서야 제대로 볼 수 있었다.높이가 무려 17m나 되는 대불은 좌우로 자기보다 작은 몇개의 보살상과 금강역사상을 끼고 있었다. 본존대불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얼굴에서 흘러넘치는 온화함과 상체에서 풍기는 풍만함,아니 위압스런 크기,완만한 곡선,부드러운 얼굴,이런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그런 느낌을 안겨주었으리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저 본존대불은 唐 측천무후를 모델로 삼아 조각했다고 한다.권력욕에 불탔던 그녀의 몸에서 저런 아름다움이 풍겨나왔을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 석불만큼은석굴의 조영이 시작된지 2백년 뒤인 당 초기에 완성되었고,또「동방의 비너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매혹적인 것만은사실이었다.
봉선사 아래에는 藥方洞이 있었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가장 먼저 조영되었다는 古陽洞이 있었다.고양동은 가장 화려하고 세련된 불감과 불상.조각들로 가득했다.그래서 세계 불교예술의 보고이자 중국의 서법이나 조각을 연구하는데 빠져서는 안되는 자료관으로 대접받고 있는 것이다.
북경~낙양간 이동에는 비행기(여름철 운항)와 열차(11시간 소요)를 이용할 수 있으며 낙양 교외의 登封縣에는 소림권법으로유명한 少林寺와 중국 5대 명산인 숭산(嵩山)이 있다.
權 三 允 〈한국경영자총연합회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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