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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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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 내 극장 ‘용’에서는 작지만 특별한 음악회가 열렸다. 마에스트로 정명훈과 그의 막내아들 민이 함께한다 하여 사람들 사이에 이미 입소문이 난 음악회였다. 그런데 정작 그날의 진짜 주인공은 정명훈도 그의 막내아들도 아닌 부산 소년의 집 관현악단 단원들이었다.

부산 소년의 집. 1969년 설립돼 현재 미취학 아동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부모에게서 적절한 보호를 받기 어려운 450여 명이 모여 사는 곳이다. 재단법인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는 부산 소년의 집은 전 국가대표팀 골키퍼였던 김병지 선수가 고교 시절 선수생활을 했던 곳 정도로 세간엔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곳에 놀랍게도 79년 창단한 관현악단이 있다. 미국인 신부 알로이시오 슈왈츠 몬시뇰이 소년의 집 현악합주단을 만든 게 모태가 된 이 관현악단은 부산 소년의 집 부설 알로이시오중학교와 전자기계고교 재학생 및 졸업생들로 구성돼 있다.

처음에는 미사를 위한 성가 반주용 정도로 시작했다. 그런데 90년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 최우수상 수상을 시작으로 관현악단 아이들이 크고 작은 음악경연대회에서 자꾸 상을 타오는 게 아닌가. 여기에 99년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가 부산 소년의 집을 방문해 협연한 것을 계기로 아이들은 자신감을 갖고 실력을 다질 수 있게 됐다.

마침내 2000년 부산 소년의 집 관현악단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것은 그 자체로 ‘감동의 탄생’이었다. 검게 그을리고 다소 꺼칠해 보이는 아이들이 손에 바이올린과 비올라와 첼로의 활을 쥐고 입술에 플루트와 오보에, 클라리넷을 대기까지 얼마나 많은 운명의 곡절이 그들의 삶을 휘저었겠는가를 한번 상상해 보라. 더구나 그 아이들을 그곳에 놓아둘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어미와 아비의 한 많고 곡절 깊은 삶의 운명 교향곡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라.

으레 있는 집 아이들이나 할 법한 바이올린과 플루트 등의 관현악을 부산 소년의 집 아이들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결코 간단치 않았을 삶의 곡절과 운명을 떠올리다 보면 그 아이들의 손동작 하나하나에 가슴이 떨리고 목이 메기까지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음악회의 1부에서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지휘로 부산 소년의 집 관현악단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객석에 있던 나는 복받쳐 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측은지정의 발동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바닥에서 일으켜 명품으로 재탄생시키는 그들에 대한 고마움과 찬사의 발로였다.

음악 평론가들은 그들이 내는 소리를 귀로 들으며 이런저런 평을 할는지 모르겠으나 나에겐 그들이 내는 소리 자체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니, 그들이 내는 악기의 소리가 아니라 곡절 많은 삶에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만의 소리를 내겠다며 혼신의 힘을 다하는 영혼의 몸부림이 나를 울렸던 것이다. 그들이 손에 쥔 바이올린과 비올라, 또 그들이 입맞춘 플루트와 오보에엔 그들 자신의 처지와 삶의 질곡 같은 운명을 넘어서려는 애절한 몸부림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베토벤의 ‘운명’을 연주하는 동안 그들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의 손에 쥐어진 악기는 비록 명품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자기 인생을 명품으로 만들고 있었다. 명품 인생은 타고난 지위와 물려받은 재산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운명에 맞서며 자기 삶에 대한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진한 애정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부산 소년의 집 관현악단 아이들은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 준 셈이다. 그래서 그들이 펼친 연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회였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