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혈통주의 거품’ 걷어내고 본 한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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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제국 그 사이의 한국

앙드레 슈미드 지음, 정여울 옮김
휴머니스트, 756쪽, 2만8000원

UN 인종차별철폐위원회가 지난 18일 이례적으로 한국인들의 ‘단일 민족’의식을 문제삼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때 맞춰 나온 이 책은 UN의 권고가 어떤 인식론적 배경 아래 나왔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게 한다.

책은 한국 민족주의의 연원을 탐색한다. 민족주의를 근대의 산물로 간주하는 서구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을 저자는 100여년 전 신문(대한매일신보·독립신문·황성신문·제국신문 등)의 논조 분석을 통해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다.

1895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시기를 집중 재조명한 저자에 따르면 “민족주의는 위기를 먹고 자란다”. 당시 한국은 사라져가는 제국과 떠오르는 제국 사이에서 표류했다. 세계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전통적 가치는 버려야 할 것으로 전락했으며, 왜구라고 폄하했던 일본의 ‘문명 개화’는 새 시대의 표준으로 떠올랐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잇따라 이 땅에서 벌어지고 국모가 살해당하는가 하면 을사늑약으로 식민지화하는 기간은 위기 중의 위기였다. 당시 언론에 등장하는 ‘격류를 헤쳐 나가는 연약한 배’ ‘붕괴될 위기에 처한 낡은 집’ ‘병든 몸’ 등의 은유는 ‘민족’ 개념의 형성으로 이어졌다고 저자는 본다.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생선’ ‘둥지에 불이 붙은 제비들’ 등은 위기에 처한 백성을 가리키는 은유였다.

청일전쟁(1894년) 개전 소식을 듣고 술렁거리는 서울 거리 외국인들의 모습. 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앵’(1894년 8월 13일자)에 실린 삽화다. 소개하는 신간은 청일전쟁 이후 식민지로 전략하기까지의 한국사를 재조명하며, 이 기간을 한국적 민족주의의 탄생기로 그려내고 있다. [중앙포토]

 저자에 따르면, 이 같은 은유를 확산시킨 당시 신문은 근대 민족 개념이 자라는 온상이었으며, 그 선두에 선 인물이 민족주의 역사학의 태두로 손꼽히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또 민족의 실체라 할 국토와 국권을 상실한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는 ‘국혼’ ‘국수’ 등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는 특징을 보인다고 했다.

한국사를 재조명하는 저자의 시선은 냉정하다. 식민주의와 민족주의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맥락에 서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대목은 특히 그러하다. 문명 개화의 근대성과 자본주의화 과정을 저자는 비판적 시선으로 재단한다. 식민주의자나 민족주의자나 ‘문명 개화’를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쌍생아일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을 우리 입장에선 어떻게 봐야 하는가.

책은 한국인들을 불편하게 하는 낯선 주제들을 많이 다룬다. 개화기와 식민지 역사에서 우리가 애써 피해왔던 상처들을 들춰내는 듯하다. 그렇다고 저자의 관찰자적 시선에 불만부터 내비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의 세계적 보편성을 강조하는 서구적 시각이, 한국사의 특수한 맥락을 깊이 짚어보는 국내 학계의 관점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우선 확인하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세계화 시대에 한국사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지나치게 온정적이고 혈통중심적인 것은 아닌 지도 되돌아볼 일이다. 또 서구에선 이미 철 지난 민족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통용되는 밑바탕엔 ‘통일 한국’에 대한 염원이 깔려 있음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해 낼 것인가 하는 문제도 풀어가야 할 숙ㅍ제다. 지은이는 미국 콜럼비아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캐나다 토론토대 동아시아 연구 분과의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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